시편 1편: 말씀을 먹는 삶

해설:

1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앞으로 읽게 될 시편들을 어떻게 묵상할 것인지 그리고 묵상의 삶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말합니다. 시편 묵상을 통해 형성되기를 바라는 이상을 “복 있는 사람”(1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 받은 사람” 혹은 “복 받을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호의 혹은 은총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물질적인 것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시편을 읽어 가면서 확인하겠지만 “복 있는 사람”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면에서 불행한 상태에 처할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태입니다. 

시인은 그 사람이 ‘하지 않는 것’(1절)과 ‘하는 것’(2절)을 대조시킵니다. 먼저,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1절) 것입니다. ‘악인’,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는 동의어로서 하나님에게 등지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르다”, “서다”, “자리에 앉다”라는 동사의 변화는 한 사람이 타락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들락날락하며 죄를 탐하다가 나중에는 서성 대다가 주저 앉습니다. 죄는 초기에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속박되어 버립니다. 

복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2절) 것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으면 율법은 억누르는 멍에가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요 기쁨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묵상하며 그분의 뜻을 찾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비유를 사용하여 복 있는 사람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3절)와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3절)합니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분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 옵니다. 생명의 근원에 든든히 연결되어 있기에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일마다 잘 될 것”(3절)이라고 합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기에 그의 삶에는 막힘이 없습니다. 잠시 막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풀어 주십니다. 

시인은 그 반대의 삶에 대해서도 비유를 사용합니다. 악인 혹은 죄인이라 불리는 그 사람들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4절)와 같습니다. 쭉정이(개역개정: “겨”)가 바람에 흩날리듯, 악인들은 부산하게 다니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은데 실은 그 속이 비어 있고 방향도 목적도 없습니다. 지치도록 열심히 살았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허무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당당히 서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5-6절). 

묵상:

‘묵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라는 뜻입니다. 읊조리기 위해서는 먼저 외워야 합니다. 성경이 문자로 보급되기 전, 히브리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외웠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시편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주 암송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외운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그 습관은 말씀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고, 읊조리는 중에 문득 말씀에 숨겨 있는 보화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문자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구전 시대 사람들에 비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암기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우리의 영성에는 오히려 해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암기하여 내 속에 넣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항상 내 바깥에 있습니다. 말씀이 필요하면 성경책을 펼쳐 보아야 합니다. 반면, 구전 시대 사람들은 말씀이 그들 마음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말씀과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하나님의 대지에 굳건히 심기어 살게 해 주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영적 습관을 회복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것은 말씀을 먹는 일이고 또한 말씀을 소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이 살이 되고 피가 되어야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대지에 견고히 심겨지게 될 것입니다. 

3 thoughts on “시편 1편: 말씀을 먹는 삶

  1. 주야로 말씀을 듣고 읽고 보고 먹어서 옳 바르게 소화시켜 말씀이 삶에서 반영 되기를 원합니다.
    매일 아침 사귐의 소리로 무장되어 승리의 삶을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세상이 인정하는 길 보다
    주님이 인정하는 길 걷기를 간구합니다. 이웃과함께 주님 사랑으로 열매 맺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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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이차적인 복 (돈, 명예,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며 복으로 누릴 때, 이차적인 복들은 옵션이 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에게는 때로는 이차적인 복들이 다가 올 때도, 혹은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으며, 오히려 더 기쁨이 됩니다.

    2020년을 마무리하고, 2021년을 시작하는 이 시기에, 내 삶이 시냇물에 심겨진 나무가 되기 원합니다. 뿌리를 깊게 땅에 내리고, 나뭇가지는 강한 바람에 흔들리며 유연하게 사는 나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인 안정감을 깊게 내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맞써서 대적하기보다는 분별과 유연함을 가지고 포용하며 흘려보내는 영성의 분별과 유연함의 깊이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히려 뿌리깊게 내린 나무가 다른 어떤 금속보다도 영적인 맺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영적 안정감을 내리고, 대항하기 보다는 분별하여 걸려내며 유연함을 가지고 대처하는 태도는 제 삶을 더 복있는 삶으로 인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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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3절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익숙한 표현이 쉬운성경/메시지 번역에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you’re a tree replanted in Eden)” 라고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 한 쪽 끝에 앉아 잠시 기도한 뒤에 성경책을 펼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글을 쓰는 이 자리가 시냇가이고 에덴이라고 믿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이 자리가 포근하고 평안하며 청량합니다. 부부만 사는 집이니 애들이 쓰던 방들 중에 하나를 내 방으로 꾸며도 되겠지만 가게를 하는 동안엔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 커다란 식탁 한 끝에 책들을 올려놓고 삽니다. 책은 곧 밥이기도 하니 식탁에서 “공부”하는 것이 묘하게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기억에 또렷이 남아 지금까지 살면서 종종 끄집어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통령 아들과 동갑이라 중학교에 시험 안 보고 들어간 세대,” 혹은 “뺑뺑이”로 중학교를 배정 받아 들어간 세대로서 낯선 동네, “후진” 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립 초등학교 (그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공부, 그림, 운동…여러 면에서 빼어나게 똑똑하던 반장 아이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를 우리집에 불러서 같이 놀고 난 며칠 뒤에 자기 집으로 불러서 찾아갔습니다. 종로구 청운동에 살았던걸로 기억하는데 자기와 언니 그리고 이모 셋이서 쓴다는 방에 들어갔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방은 온통 책꽂이로 가득 했고, 책꽂이 마다 책으로 가득 차 뭐라도 올려 놓을 공간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모는 당시에 이어령 교수 밑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얼마 되지 않아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친구에게서 난생 처음 “티 에스 엘리옷”이라는 이름도 들어봤고 학교에선 친구가 쓴 시를 놓고 이게 과연 중 1 아이가 쓸 수 있는 차원인가를 놓고 선생님들이 혀를 내둘렀던 일도 있었습니다. 친구는 얼마 안 있어 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조기유학”의 원조라고 할만합니다. 십여년 전까지도 몇 년에 한 번씩 서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지금은 아마 미국 정치경제계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왜 그때 그 친구 집에 책이 가득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왜 그 친구가 그리도 유식이 부러웠는지…그 친구 집에 갔다온 뒤로 한동안 우리집이 싫어졌던 기억 또한 생생합니다. 나는 왜 걔가 아니고 나일까…하는 질문도 했습니다. 6학년 때는 교회를 “발견”했고 중 1 때는 지성을 보았습니다. 사춘기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는 주어진 가정 배경과 능력을 잘 사용하여 몸 담았던 대학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열매가 보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지, 어떤 영적인 훈련을 하며 사는지는 모릅니다. 나는 그저 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있는 이 자리가 복된 자리인가. 나는 복된 사람인가. 예스! 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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