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5장: 우리를 감찰하시는 이유

해설:

엘리후는 계속하여 욥에게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옳다 하실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2절). 또한 그는 설사 자신이 죄를 지었다 한들 하나님께 무슨 해를 끼칠 것이며 자신이 의롭게 산다 한들 그분께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3절). 엘리후는, 하나님은 높고 크시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하나님께 해를 입힐 수 없고 인간이 아무리 큰 공로를 쌓는다 해도 그분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욥의 말이 맞다고 응수합니다(4절). 그것은 다만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끼칠 뿐입니다(5-8절).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에 대해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고 정의로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어두운 때에도 희망을 주시는 그 창조주 하나님”(10절)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짐승이나 새가 가진 지혜보다 더 나은 지혜를”(11절) 주셨습니다. 그 지혜로써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10절, 11절). 진실로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거만하고 악한”(12절) 태도로 구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13절). 욥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가 거만하고 악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14절). 그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하여 악을 쌓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나타나셔서 그를 벌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15-16절).

묵상:

욥이 하나님을 향해 “내 죄가 많다 한 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해를 입힌다고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라고 말한 것은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고 있는 징벌이 너무나 무겁기에 그렇게 하소연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후가 욥의 말뜻을 곡해한 것입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서 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망발을 쏟아 놓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보지도 않으시고, 그들의 호소를 들어 주지도 않으시므로, 그 악한 자들의 울부짖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13절)라는 말은 일반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욥을 악한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해를 입히고 우리의 선행이 그분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충만하고 완전하기에 피조물인 우리가 더하거나 뺄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지은 악행을 사용하여 선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에 대해 관심하시고 의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죄와 악을 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불행의 길을 찾는 것이고 의와 선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복되게 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듯,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불행을 우리 자신보다 더 마음 아파하시고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3 thoughts on “욥기 35장: 우리를 감찰하시는 이유

  1. 만왕의 왕 만유의 주님을 다 알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저희들과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긴밀히
    소통 하시기를 원하는 주님이심을 확신합니다. 저희들이 잘못하였을때는 안타가워 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때에는 기뻐하시는 주님 이십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성도들을 옳다고 하시는
    구원자 이십니다. 질병으로 많은사람들이 희생되고있는 와중에 백신을 허락하신 사랑의
    주님을 이웃과 함께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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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요 특별한 혜택입니다. 성경 텍스트가 누구에게나 공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씀과 일반인의 거리를 좁혀준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교육이 보편화 된 것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필연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내가 체험하고 기억하는 시간의 폭은 몇 십년 밖에 되지 않지만 성경 말씀을 읽을 때는 백년 천년의 시간 속에 녹아있는 지혜의 보물이 내 것이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목적은 지혜를 알아내는 것 이상입니다. 지혜를 깨닫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깨달은 지혜가 내 안에서 운행하고 나를 움직이고 또 밖으로도 흘러나가기를 원합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성령이십니다. 말씀의 영향을 받아 내게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이 말씀 안에서 질서를 잡습니다. 그 질서는 성령께서 만드는 질서입니다. 적극적인 내 행동 – 말씀을 읽는다, 묵상한다, 고민한다, 찾아본다, 적용해본다…의 결과물로서 받는 상급으로 여겨지는 때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둔하고 어리석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때 맞추어 나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욥은 그가 가졌던 내적인 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었던 질서가 다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죄가 질서를 무너뜨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욥의 죄나 의로움보다 큰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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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짐승이나 새보다 나은 지혜를 주셨고 (11절), 그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나아가야 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혜에 대한 논의는 고대철학 때부터 지금 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지혜라는 부분은 인간의 특권이며 계속 이야기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그룹은 다양한 상황에 맞는 시의적절한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 지혜라고 여기고, 다른 그룹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지혜라고 주장합니다. 짐승과 새보다 나은 지혜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또한 언제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더 지혜와 가까운 듯합니다. 그러나 여러 상황에 맞는 적절한 의견 및 지혜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욥은 어떤 지혜를 가지고 당시를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자신이 탐구한 보편적인 진리보다는 학습되어지고 만들어진 지혜를 답습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축해봅니다. 그렇기에 어려운 상황에 자신이 믿고 알고 있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더 존재적인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탐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이미 우리의 어떠함으로 더 첨가되거나 더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이미 선하시며 완벽하시고 영광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반사체로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지혜를 가지고, 내 삶을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반사시키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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