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7장: 터무니 없는 교훈

해설:

욥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그의 대답은 세 친구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고 계시며 자신에게는 지금 당하고 있는 재앙을 받을만한 죄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믿기에 뜻을 굽힐 생각이 없습니다(1-6절).

7절부터 10절에서 욥은 원수들을 저주합니다. 여기서 “원수들”은 자신을 무고히 정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 친구를 염두에 둔 말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보고 그들의 잣대로 심판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생각하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환난이 닥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한 말들을 욥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더러 말해 보라고 하면 친구들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의 바닥에 처하고 보니 그 모든 말들이 터무니 없어 보였습니다(11-12절). 

13절부터 23절은 욥의 말로 보기 어렵습니다. 20장에 나오는 소발의 말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소발의 말이 욥의 말로 잘 못 편집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만일 욥이 한 말이라면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그처럼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느냐?”(12절)라고 말한 다음, 그들이 한 말 중에 가장 터무니 없어 보인 소발의 말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반드시 벌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복 주신다는 단순한 교리는 현실에서 너무도 터무니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묵상:

세 친구가 욥에게 한 말들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들어 왔던 것들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알아 듣기 쉽고 적용 가능한 ‘교훈’으로 환치시켜 들려 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재판관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시고, 잘 못할 때는 회초리를 드시고 잘할 때는 상 주시는 분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착하게 살면 만사형통 할 것이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누릴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형통하고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은 믿음이 좋다는 뜻이고, 길이 막히고 실패하고 가난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렇게 배웠기에 우리는 하나님 눈에 잘 보여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욥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의 깊은 질곡에 빠져 보니 그것이 터무니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믿음 좋고 의롭게 사는 사람도 불행에 빠질 수 있고, 불경건 하고 불의하게 사는 사람이 떵떵 거리며 살아갑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를 다스리신다면 권선징악의 단순한 원리를 넘어 서서 활동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려는 이유도 그분의 눈에 들어 복 받자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이유는 그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을 교훈으로 환치시키는 교회의 습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인생에 적용할 쉽고 간단한 교훈을 찾아 내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상과 계획과 소망을 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4 thoughts on “욥기 27장: 터무니 없는 교훈

  1. Almost Christian이라는 책에 보면, 교회의 교육이 Moralistic Therapeutic Deism 에만 갇혀있다고 지적합니다. 권선징악과 함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교회가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도덕적이고 예의가 바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교회교육의 목적은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내 안에 잘못잡혀왔던 생각과 사고들을 내려 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내 사고에 갇힌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내 믿음과 사고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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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해설 말씀에 감사 또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영 어색하고 불편한 때는 잘 정리된 공식을 들이 밀면서 “믿음의 원칙”이라고 주입하는 때입니다. 상벌이 뚜렷하신 하나님, 교회에 열심이면 좋은 믿음,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 믿으며 구하는 기도는 다 들어주시는 주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까지…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그런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목사님들의 고민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하고 힘있게 “답”을 말해주지 않으면 저마다 제멋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니 주관식은 절대 안되고, 사지선다 식도 좀 복잡하고, 결국 맞으면 O, 틀리면 X 문제만 공부시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귐의 소리 묵상 시간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말씀의 거울에 물어보니 다른 답이 돌아옵니다. 동화 속 마녀에겐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백설공주를 보여 주었지만, 묵상의 거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내 얼굴이기도 합니다. 매주 한 번씩 줌으로 교회 소그룹 말씀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한국을 방문 중인데) 한주간 묵상을 나누다 요새 한국에서 트로트가 대유행을 하는데 노래 중에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라는 노래가 있는데 말씀을 읽다가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에게 곧바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했답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는 훈련을 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욥은 자기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단 한 분 하나님은 오늘도 침묵하십니다. 자기 인생에 느닷없이 찾아온 실패를 통해 자신의 내부세계를 허물고 다시 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욥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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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절대적인 믿음을 원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죄 사함을 받았을때 이미 만왕의 왕 만유의
    주님의 자녀가 된 영원한 축복을 기억하고 즐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잠시의 환란과 시련은
    더 큰 축복을 감당하도록 마련하신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달게받는 결단을 기도합니다.
    종 종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않도록 성령의 인도를 간구합니다. 이웃과 함께 절망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주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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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꾸준이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려는 진장성을 갖고 기도에 임하기를 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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