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6장: 하나님은 신비다

해설:

빌닷의 말에 욥이 응답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5절부터 14절까지는 앞(25장)에 나오는 빌닷의 말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욥이 빌닷이 말하는 투로 빈정 거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빌닷이 지혜로운 말로 자신을 깨우쳐 주려 하지만 헛된 말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1-4절). 

5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세계까지 모두 다스리십니다(5-6절). 7절부터 10절까지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그분에 의해 창조 되었고,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도 그분의 다스림 때문입니다(11절). 12절의 ‘바다’는 죽음의 세계를 가리키고 ‘라합’은 죽음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는 죽음의 세력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13절).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로서는 그분의 전모를 알 수 없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14절).  

이것이 빌닷의 말이라면, 하나님께 저항하지 말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만일 욥의 말이라면, 23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너무 높기에 인간으로서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는 반박일 것입니다.  

묵상:

참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마땅히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일 것이고, 온 우주와 생명 현상을 다시리는 분일 것입니다. 그런 분이라면 생명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모두 다스리실 것이고,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를 모두 관장하실 것입니다. 그런 분이라면 그분의 지혜는 온전하고 그분의 뜻은 언제나 옳아야 합니다. 그분의 정의는 모두에게, 언제나 공정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편애가 없고 모두에게 미쳐야 합니다. 그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신이라 이름 붙일 자격이 없고, 인간의 경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로서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장기판에서 말을 두는 분이라면, 우리는 장기판 위에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판 위에 있는 말로서는 전체의 판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때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선의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그분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만든 교리나 공식으로 그분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빌닷과 욥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고 있지만 다른 결론에 이릅니다. 빌닷은 “그렇기에 입 다물고 하나님의 처분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욥은 “그렇기에 왜 그러시느냐고 따져 묻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thoughts on “욥기 26장: 하나님은 신비다

  1. 제가 하나님을 아는것은 극히 적은 일부분이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사랑과 은혜와
    좋으신 하나님 입니다. 방황하는 친구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는 지혜를 원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때에도 같이하시고 안타가워 하시고 언젠가는 구원의 손길로
    잡아주시는 선한목자를 마지막 숨질때 까지 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고난은
    끝이있고 영원한 주님의 은총을 이웃과 함께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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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냉철하게 하나님의 뜻을 친구에 전하며 친구를 정죄하는 빌닷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 따지는 믿음이 마음에 와 다으며 끊임없이 일어나는 “왜” 라는 단어로 하나님께 질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묵상하며 기다리는 믿음으로 거듭나기를 간구합니다.
    보잘 것 없고 극히 작지만 제사장으로 세워주시어 주님과 직접 대화를 할수있게 인도하신 예수님께 경배와 감사를 드립니다.
    코비드 시기에 무사이 일상을 할수있게 내려주시는 은혜에 감사함을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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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빌닷이 처음으로 말하는 것이 8장입니다. 특히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유명한 귀절을 말한 사람이 빌닷입니다. 개업하는 가게에 이 귀절을 액자에 담아 주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걸려 있지 않으면 주인이 크리스찬이 아닌가보다 싶을 정도로 흔하게 보는 귀절입니다. 오늘 본문 26장을 읽고 묵상하는데 문득 이 귀절이 떠올랐습니다. 26장까지 오는 동안 전개된 욥의 속마음을 되짚어보니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진했던(?) 그의 의식이 어느새 어른의 갈등과 번민도 담고 있음을 봅니다. 순진한 어린이가 때묻은 어른이 되는 것은 사회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곧 일반적이고 가치중립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찬은 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죄의 영향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본래 흠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는데 죄가 들어옴으로 형상이 가리워졌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님이 죄의 힘을 누르시고 하나님의 영광된 자녀로 새롭게 지어주셨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 뿐인 얼굴로 지어졌는데 남들처럼 똑같은 얼굴로 사는 것이 죄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믿음의 사람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었다 다시 어린이가 되는 것이 순리인지 모릅니다. “나이들면 애가 된다”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니고데모가 고민한 거듭남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원래 모습을 되찾아 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애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욥의 첫 말은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은 채로 나왔으니, 벌거벗은 채로 그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입니다. 빌닷이 말하는 시작과 나중, 미약과 창대가 무엇을 가리키는 지 모르지만 욥은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믿음은 겉으로 보기엔 오히려 뒷걸음치는 것 같고, 그의 재산은 창대에서 미약으로 뒤집혀졌습니다. 그럴까요. 욥에겐 이게 다 일까요. 욥의 고민과 고난은 계속 됩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가 아직 아닙니다. 욥의 싸움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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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한국의 주입식교육은 학생들의 “Why”라는 질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의견과 질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강의나 책을 읽더라도 수동적으로 지식만 습득할 뿐, 질문에 대해서는 많이 꺼려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진리를 (하나님을) 탐구하는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교리로 만들어지는 막연한 믿음이 아닌, 탐구함으로 얻은 지식과 믿음은 즉, 경험이 체험이 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경험은 표면적인 외부적인 사건인 반면에, 체험은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지며, 내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God sets a boundary between light and darkness), 성경으로 계시한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더 넘어서, 체험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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