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5장: 하나님의 절대 기준

해설:

빌닷이 세 번째로 입을 열어 말합니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26장 5-14절을 25장에 이어지는 빌닷의 말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 25장의 내용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성서학자들 중에는 24장 18-25절도 욥의 말이 아니라 소발의 말이었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욥기가 오랜 시간 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오다가 글로 쓰이고, 글로 쓰인 이후에 오랜 기간 동안 필사되어 전해지다가 최종적으로 성경에 편집된 것이므로 그럴 수 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며 또한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정결하심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의롭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도 부정하고 덧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러 욥에게 독한 직설을 날렸던 엘리바스와 소발과 달리, 빌닷은 끝까지 에둘러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 보았자 하나님 앞에서는 부질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어떤 중년 남성이 이민 생활 중에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야심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빈 손으로 손을 떼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가족에게 말도 못하고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던 중에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로 모인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그 때까지 한 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습니다. 새벽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고 마음은 답답하여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시간이 되어 불이 켜지고 첫 찬송을 불렀습니다. 때는 사순절 특별 기도회 기간이어서 첫 찬송으로 143장을 불렀습니다. 그분은 의자에 비치되어 있는 찬송가를 펼쳐서 눈으로 가사를 보면서 찬송을 따라갔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나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가사에서 그분은 빈정이 상해 버렸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벌레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꽤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날, 첫 찬송을 통해 성령께서는 그분에게 자신의 능력 위에서 쌓아 올린 헛된 자존감을 내려 놓으라고 그를 흔드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 이유는 사업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자존감에 입을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분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절대값을 인정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시며 강하시며 또한 거룩하신지를 강조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스스로를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6절)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죄악에 물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씻어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회복시키십니다. 절대무의 존재가 절대적인 가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4 thoughts on “욥기 25장: 하나님의 절대 기준

  1. 빌닷을 통해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하나를 배우며 악에 물를어 있는 우리 자신의 뿌리를 반추해 봅니다, 주님 하등의 가치조차 없던 인간을 궁휼이 여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의롭게 빛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감사의 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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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의 고귀한 뜻과 계획을 혼자서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어리석게 살아 왔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안에서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원합니다.
    비록 어려운 문제에 처해있더라도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웃과함께 고통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믿음의 형제 자매와 같이 울고
    새나라와 새땅에서 새몸을 기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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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본문 끝에 우리를 “구더기 같은 인생, 벌레 같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피라밋을 세운 고대인들을, 우주로 날라가 일년도 넘게 살다 오는 현대인들을 구더기요 벌레라고 여길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데 그런 대단한 위업을 세우는 사람도 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구더기와 벌레 만도 못한 먼지 같이 덧없고 허무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지 않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3절)”라고 빌닷이 묻습니다. 이 또한 믿음의 눈으로 발견한 사실입니다. 좋아하는 작가 고 최인호님의 에세이에 나오는 선시 가운데 “세상과 청산은 어느 쪽이 옳은가/ 봄볕이 없는 곳에 꽃이 피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이 물음은 우리를 얽어 매고 부자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욥과 친구들은 계속해서 시비를 가려왔습니다. 친구들의 자리는 마른 자리요, 욥이 지금 있는 자리는 진 자리입니다. 욥이 세상 속 시장바닥을 걷고 있다면 친구들은 공기 좋은 깊은 청산 계곡에 앉아 있습니다. 봄볕의 공평함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은 수도자가 남긴 시에서 우리는 세속과 청산, 나와 너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마음 속으론 진리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빌닷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심판의 빛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꽃을 피게 하는 봄볕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강림절이 시작되었으니 새해가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소망으로 견디고 사랑으로 보게 하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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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주하였을 때,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했듯이, 이 고백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하는 고백입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 작고 미약한 인간은 경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시고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오늘 하루도 나아갑니다. 또한 질그릇과 같은 나의 존재에, 보물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니, 나의 가치는 보물을 품은 질그릇처럼, 보물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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