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1장: 대답 없는 질문

해설:

소발의 악담에 가까운 비난에 대해 욥이 답합니다. 그는 먼저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2절)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위로의 기본으로 꼽는 ‘공감적 듣기’를 욥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발과 친구들은 욥의 말을 마음 담아 듣지 않고 그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발에게 응답 하면서 욥은 자신이 그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는 자신이 당한 불행 때문이 아니라 더 큰 문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4-6절).

앞에서 소발은 악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욥은, 현실은 그 반대라고 반박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자손들과 가축들까지 번성합니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누리고 즐기다가 아무런 고통 없이 무덤으로 내려갑니다(7-13절). 그들은 거룩하고 바르게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그들의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14-1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는 일은 본 적이 없습니다(17-18절).

어떤 사람들은 악한 자가 살아 생전에 징벌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19절)고 말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 욥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후손에게 조상의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는 것 자체가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현실의 악한 상황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19-22절). 또한 현실을 보면 행복과 불행은 무작위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23-26절).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려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조상 때로부터 전해 내려온 믿음의 공식을 따라 자신을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려 하기 때문입니다(27-28절). 욥은 세상 견문이 더 넓은 사람의 말을 들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악한 자들이 죽을 때까지 온갖 축복을 누리고 사는 일은 세상에 흔한 일입니다(29-33절). 소발과 친구들은 세상사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단정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리로 알고 있는 것이 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34절).

묵상:

욥의 답답함과 분노는 단지 자신이 당한 불행과 고통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에 눈을 떴습니다. 번영과 축복을 누리는 동안에 그는 자신만의 성 안에 갇혀서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당한 불행은 그를 가두고 있던 성채를 무너뜨렸고, 욥은 비로소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알면서도 눈 질끈 감고 부정했던 현실들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세상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잿더미에 앉아 온 몸에 난 상처를 긁으며 세상을 돌아 보니, 세상사와 인간사가 뒤죽박죽, 엉망진창입니다. 그것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분통을 떠뜨리게 만든 이유입니다.

우리가 몸 담아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무 원칙도 없이 돌아간다는 인식 그리고 인간사에 아무런 원리도 없이 행과 불행이 무작위로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화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팔자 소관으로 돌리고 체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이 왜 이렇습니까? 인생이 왜 이렇습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지, 이 세상사에 정말 관심이 있으신지, 그분은 정말 정의로운 분이신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 물음에 뾰족한 답이 없기에 우리는 때로 좌절하고 때로 분노합니다. 나름대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되는 일이 없고 나쁜 놈들은 떵떵 거리며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분노는 더 심해집니다.   

3 thoughts on “욥기 21장: 대답 없는 질문

  1. 악한자들의 삶과 모든일이 형통해 보이는것은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눈으로 저희들이 세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악한자들이 잘사는것
    은 한순간이고 그들이 걷는길은 멸망의 길 임을 기억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이웃과 더불어 감사하는 주간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루에 필요한 영의 양식에 감사합니다. 영생의 소망에 감사합니다. 공의의 주님께
    감사, 감사 또 감사합니다. 아멘.

    Like

  2. 영어에 보면 “The elephant in the room” 이라는 표현법이 있습니다. 코끼리가 방에 있어서 불편하지만, 코끼리를 끌어내기에는 코끼리의 무게나 모든 부분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두 가만히 코끼리와 함께 하면서 침묵하는 그림입니다. 즉, 같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모두 다 아는 예민한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꺼내기에는 더 엄청난 논의거리가 있기 때문에 모두 다 그 문제에 침묵하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The elephant in the room” 인 것 같습니다. 수학 공식처럼 답을 얻기는 어렵고, 그 안에 파생되어지는 여러 논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향상시키고, 우리의 약함, 존재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내 안의 맑았던 물이 뿌옇게 될 수 는 있으나, 그로 인해서, 내 안의 마음이 흙탕물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더 맑은 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인 것 같습니다.

    Like

  3. 왜 낙원 한 가운데 선악과를 두셨을까, 왜 눈에 잘 띄는데 두시고 먹지 말라고 명하셨을까. 자유와 책임, 사랑과 순종처럼 두 손이 같이 가야 하는 법칙을 깨달으라고 그렇게 두신걸까. 고통을 통해 눈이 열려 세상의 부조리가 보이고, 선과 악이 뒤죽박죽이 된 현실과 맞닥뜨린 욥은 선악과를 먹고 난 아담과 같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벗은 몸, 부끄러움, 후회, 두려움 등등 새로 알게된 지식을 놓고 어찌할 줄 모른 것처럼 욥 또한 비로소 알게된 현실 앞에서 쩔쩔 매기만 합니다. 아담도 욥도 자신이 낯설기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게 아담이라면,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밀쳐 내시고 멀리 가셨다고 느낍니다. 낙원 같던 욥의 삶이 지옥처럼 되었습니다. 지옥 같은 이 땅의 현실을 회복시켜 주실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초자연적인 변화로든 개개인의 내적 변화를 통해서든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나는 나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욥은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었지만 이것 갖고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기다리고 기다릴 뿐입니다.

    Lik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span>%d</span>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