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0장: 앙심 품은 심판자

해설:

욥은 하나님을 향해 다시 원통한 심정을 쏟아 놓습니다. 앞(9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그분의 크심과 높으심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자신같이 하찮은 존재를 붙들고 작은 죄까지 찾아 내려 하신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2-6절). 게다가 그는 하나님께서 손수 빚어 창조해 주신 존재이며, 지금까지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7-12절). 

욥은 결국 하나님께서 악의를 품고 그를 노려 보고 계셨다고 결론 짓습니다(13-14절). 자신이 올바른 일을 할 때에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죄를 지을 때면 가차없이 고통을 주십니다(15-17절). 그럴 의도였다면 왜 자신을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욥은 하나님께 항의합니다(18-19절). 더 이상 바랄 것 없으니, 이제라도 자신을 내버려 두셔서 죽기 전에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20-22절).

묵상:

여기서 욥이 하나님께 쏟아 놓고 있는 비난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누린 복은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복을 누리며 산 기간은 수십 년이요, 그가 고통 받고 있는 기간은 “여러 달 동안”(7:3)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히기만 해 온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짓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가차없이 내게 고통을 주시지만, 내가 올바른 일을 한다고 해서 주님꼐서 나를 믿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15절)라고 항의하지만, 실은 욥 자신도 자신이 누리는 복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난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욥처럼 하나님을 ‘앙심 품은 심판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은 회초리를 등 뒤에 숨기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보다가 조금이라도 잘못 하면 내려 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혹은 자신이 잘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치셨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일들 속에서만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그 반대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마 6:8)고 하셨고,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마 7: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앙심 품은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 깊은 아버지’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면, 매일의 일상 속에서 늘 움직이시는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5 thoughts on “욥기 10장: 앙심 품은 심판자

  1. 욥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며 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짓는 모든 불평을 통해 아직도 욥은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며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항의하지만 목사님 해설같이 그가 누린 평생의 복락은 전여 잊고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인간의 한계를 다시한번 고백하게 됩니다.
    얘수님의 말씀같이 생선을 달라할 때 뱀을 주시지 않고 미리알아서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의 일상에서도 주님의 손길과 입김을 느끼는 하루로 은총내려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Like

  2. 끝없는 사랑과 신실 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원합니다.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기위해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허락 하셨다는 확신을 갖고 감사와
    소망으로 견더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혼란가운데서도 안식을 갖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이유를 이웃과 같이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

  3. 기분이라는 감정은 매일, 매시간, 매 순간마다 바뀌는 바람과 같습니다. 현재, 욥의 기분 변화는 카멜레온의 색깔이 바뀌 듯이, 매 순간마다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심신의 약함과 고통 때문에 그렇겠지요. 심신이 약해지면 드러나는 감정중에 하나가 “비교의식”인 것 같습니다.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한탄함을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서는 특별히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욥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집니다. 우울중으로 고생하는 분들의 감정또한 이런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하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우울의 기질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말아야 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봅니다. 정의와 옳고그름이 아닌, 이해함과 경청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위로하기를 기도합니다.

    Like

  4. 어렸을 때 엄마를 따르고 우리 집에 자주 오던 사람들 중에 불교신자가 있었습니다. 엄마와 알고 지낸지 아주 오래된 사람이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친척처럼 여길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절에도 자주 가고, 말이나 행동도 그와 10분 정도 같이 있으면 불교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여자는 죄가 많아서…”가 있습니다. 비록 남편은 없어도 집안 살림이 옹색하지 않고 성격자체도 너그러운 편이라 누구에게나 잘 주고, 본인이 배운게 없어 (여자라서) 내세울 것이 없다며 늘 겸손했는데 여자는 운명적으로 죄를 타고 태어난 존재라 그 업을 갚으려면 남자에게 늘 복종하고 어떤 일도 다 팔자려니 받아 들이며 살아야 한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 앞에서는 그런 말을 쉽게 못했던 것 같고 나와 둘이 있을 때든지, 여자들끼리 모여 있을 때 그렇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기독교 사상은 이런 말에 대한 반대의견으로 시작되고 나름 발전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가 절에 가서 비는 것은 자기와 자식이 무탈하게 살고, 마 (나쁜 일)가 끼지 않고, 돈이 잘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살면서 고민이 되거나 궁금한 일이 있으면 늘 “어디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했습니다. 엄마는 “묻기는 뭘 물어, 자기 생각한대로 하면 되지, 점쟁이들이 뭘 안다고”하며 못마땅해 했습니다. 집에 드낙거리던 사람 중에 순복음교회에 푹 빠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에 열중하느라 돈벌이는 거의 중단하고 살던 가장인데 그 사람도 엄마 눈에는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다 자기 좋은대로 기도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는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통치, 뜻… 이런 단어는 쓸 줄 몰랐지만 엄마의 하나님 인식은 남자나 여자를 구분하지 않으시는 분, 사람의 잘못을 그때 그때 벌하지 않고 몰아서 야단치시는 분, 사람이 하나님을 몰라서 안 믿는 것이지 하나님 밖에는 결국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읽으니 자라면서 집에서 듣던 말들이 떠오릅니다. 욥이 가진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기 전의 모습 같습니다. 창조주시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데 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자기 허물에 주목 (6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는 마치 자기 집을 줌인 zoom-in 해서 미사일을 쏜 것 같은 하나님을 연상시킵니다. 세상은 다 잘 돌아 가는데 나만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욥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 덕분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죄와 허물에 비례해 대하시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회개하며 고치는 마음을 늘 새롭게 주소서.

    Like

  5. 저는 후회를 자주합니다. 그 이유는 제 마음에 불평불만이 많기 때문이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일이 너무도 많지만 제 성에 차지 않는 일에 자꾸 마음이 갑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에 민감하고. 그런일이 있었던 이유를 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달라졌을까 되뇌입니다.

    물론 고통 속에서 아픔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찾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슬퍼하는 마음에는 원망과 후회가 섞이기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하나님이 게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그 믿음 지킬 수 있도록 저를 기도로 경배로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시련을 주신다면 제가 감당케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Lik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