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장: 일반론의 허점

해설:

이번에는 수아 사람 빌닷이 입을 엽니다. 그는 욥의 말 하는 태도를 책망하면서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3절)고 묻습니다. 자신이 무고하게 혹은 억울하게 징계 받고 있다는 욥의 주장을 겨냥한 말입니다. 

빌닷은 욥의 자녀들에게 숨겨진 죄가 있었기에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절). 죄에 대한 징벌을 달게 받고 자비를 간절히 구하면 그리고 그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6절) 하나님은 그의 가정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면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7절, 개역개정: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입니다. 

이어서 빌닷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8-10절). 그는 식물을 비유로 삼아 그 지혜를 전해 줍니다(11-19절). 뿌리가 잘리면 어떤 식물이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은 모든 사람의 앞길이 이와 같을 것이며,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소망도 이와 같이 사라져 버릴 것”(13절)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믿고 의지할 대상은 썩은 줄 혹은 거미줄과 같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20-22절).

묵상: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뿌리 잘린 식물과 같다는 빌닷의 비유는 옳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등지는 것은 존재의 근거로부터 잘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의지할만한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분이 아닌 다른 것에 희망을 두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이 말했듯, 하나님을 등지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에게 등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닷이 욥에게 전하는 ‘조상들의 지혜’는 옳습니다.

하지만 비옥한 토지에 뿌리를 둔 나무들 중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는 나무도 있고 폭풍에 쓸려 뿌리 뽑히는 나무도 있습니다. 때로는 병충해나 산불로 인해 산 전체가 피해를 입기도 하고, 숲 전체를 위해 일부 나무를 베어내기도 합니다. 뿌리가 대지에 든든히 심겨 있는 것이 생명의 기본 요건이지만, 그런 나무에게도 불행한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에게도 불행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당하는 불행이 모두 불신앙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빌닷은 그 사실을 망각했거나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욥에게 잔인한 말을 쏟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욥에게 그토록 큰 시련이 닥친 이유는 자녀들에게 숨겨진 죄가 있었기 때문이며 욥 자신도 충분히 깨끗하고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그것이 일반론의 허점입니다. 

4 thoughts on “욥기 8장: 일반론의 허점

  1. 빌닷의 구구 절절이 옳고 입바른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공허하게 느끼며 일반론적인 사필귀정이 믿음을 잘못 인도할수있다는 의구심을 자아냅니다.
    어떤 잘 못된 결과가 일어낳을 때 론리적으로 하나님께 따지기 보다는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난ㅁ과의교제가 앞서기를 기도합닏.
    빌닷같은 논리보다는 무조건 하나님의 자비와 궁휼을 비는 믿음이 성숙하기를 기원합니다.
    개표후 어수선한 분위기를 주님께서 다잡아 주시고 전상적인 질서로 되돌아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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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코로나 예방약이 속히 나온다는 소식에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모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 들이고 사귀고 섬기고 나누는 시간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마음의 진정한 위로와 회복이되는 지혜를 원합니다.
    비록 억울한 박해와 고난을 당했더라도 끝까지 주님의 언약을 붙들고 인내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웃과 함께 악을 선으로 이기는 주님의 자녀의 합당한 삶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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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난과 아픔을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일반화의 논리와 준거틀을 가지고 맞추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당하는 자와 아픔이 있는 자와 함께 울라! 라고 하는 말처럼, 그 사람의 처한 상황과 환경, 그리고 그 고난과 아픔을 정의 (옳고 그름) 해주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 그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 되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섭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제가 또 다른 날카로운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차고 넘쳐서, 오히려 욥과 같은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공감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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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욥의 곁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친구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가엾고 측은했겠지요. 저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나 기가 막혔겠지요. 저러다 곧 죽겠다 싶었겠지요. 빌닷은 자녀를 잘못 키운 부모로서 받는 죄값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잘못된 사람, 뿌리 뽑힌 식물을 없앤 자리에 더 나은 사람과 식물이 생겨나 처음보다 창대한 모습이 될 것이라는 위로도 얹어 말합니다. 욥은 자녀의 생일을 맞으면 다 불러 잔치를 하고 자녀 수대로 번제의 제사를 올렸습니다. 자기의 언행을 늘 돌아본 것은 물론이요 “자녀들이 마음으로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저주했을지 모른다 (1:5)”는 걱정에서 이렇게 꼼꼼하게 제사를 올린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빌닷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조소하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자식의 죄라고 해도 아비가 이렇게까지 벌을 받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이제라도 조상들의 지혜를 기억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라고 권하지만 마음 속에까지 닿지 않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전능자의 징계를 거절하지 말라고 (5:17) 권했습니다. 까닭없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빌닷은 자녀의 죄로 인한 고통일 것이니 조상들이 했던대로 – 회개의 제사겠지요 – 주님께 돌아오라고 합니다. 욥의 마음을 무겁게하는 말들입니다. 친구들의 목적은 위로에 있었겠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칼처럼 날카롭습니다. 아무 말없이 같이 있기만 했던 처음 일주일이 더 좋았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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