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장: 구덩이 안에서 보는 세상

해설: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크기를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극한의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밤이 오면 잠 못 이루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낮이면 다시 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고통 가운데 있다 보면 하루의 시간은 너무도 더딘데 일 주일 혹은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욥은 “내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6절)고 탄식합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 종말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절망합니다.

7절부터 21절까지는 탄식의 기도입니다. 앞에서(3장)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불평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직접 항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쏟아 놓습니다. 

먼저 욥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는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11절)라고 항의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요지는 “설사 제가 죄를 이었다 한들 이토록 극한의 고통으로 징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순간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 들면 악몽과 환상으로 깨우시고, 죽고 싶지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침 꼴깍 삼키는 순간”조차도(19절) 하나님은 그를 지켜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욥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을 마음에 두십니까?”(17절)라고 여쭙니다. 또한 그는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20절)라고 여쭙니다. 죽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덧없는 존재인데, 그가 지은 죄악이 얼마나 크다고 이토록 잔인하게 괴롭히는지를 여쭙니다.

묵상:

정도 이상의 고통을 정도 이상의 기간 동안 겪게 되면 심신이 쇠잔해지고 영혼이 쇠약해집니다. 그럴 때면 모두에게 버림 받은 것 같은 느낌에 압도 됩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서운함을 느끼고 배신감을 느낍니다. 위로하기 위해 던진 말이 고통 받는 사람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이유는 분별없이 말하는 사람에게도 있지만 듣는 사람의 피해망상적인 심리에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징계 받는 것 같고 버림 받은 것 같은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으로 삼고 고난의 화살을 계속 쏘고 있다고 느낍니다(6:4; 7:20). 그분은 한 순간도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잠시라도 자신이 쉬는 꼴을 보지 못하신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벌 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분노는 더욱 뜨겁게 타오릅니다. 그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억누르고 있었는데, 엘리바스의 충고에 터져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의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가 아니었고, 그가 고통 받는 동안 하나님은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고난의 구덩이에 빠지면 구덩이와 구덩이 위의 하늘만 보입니다. 고난이 위험한 것은 세상과 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4 thoughts on “욥기 7장: 구덩이 안에서 보는 세상

  1. 두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한가지는 내가 만약 욥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른 한가지는 내가 욥의 친구 엘리바스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난 앞에 누구든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이겨낸다라는 말은, 고난을 지배하고 싸워서 이기기 보다는, 그 고난을 참고 잘견뎌낸 것임을 기억합니다. 고난 앞에서 옳고 그름을 내세우는 정의가 아니라, 마음을 공감하는 이해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앞에서 즉각적으로 불평과 불만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공간을 두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알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을 선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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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욥의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을까요. 강풍이 덮쳐 자녀들이 다 죽고 가축은 갈대아 강도들에게 다 뺏겼다는 종의 보고를 받고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21)” 라고 답하던 욥입니다. 살갗이 곪아서 터졌다 아물기를 반복하며 구더기가 가득 (7:5)한 상태에서 자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위안이 죽지 못해 하는 자리에 놓이니 하나님은 왜 이렇게 괴롭히고 감시하느냐고 대듭니다. 고통의 뒤에 사탄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악의 존재, 고통의 기원도 다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욥을 시작할 때 목사님 해설이 가리키듯 하나님의 의지와 악의 존재 (theodicy) 라는 주제는 신학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매끄러운 정답을 얻지 못한 채 인류는 고통의 시간을 살다 죽었습니다. 해럴드 쿠쉬너도 어린 아들을 암으로 잃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랍비로서 통찰과 묵상의 심연에서 그가 건져 올린 것은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도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어쩌지 못하신다는 그의 주장, 인간이라는 운명 (fate)의 조건이 문제를 만든다는 주장은 전통적인 유다교인들과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 모두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눈을 멀게도 하고 뜨게도 합니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게 만들지만 어둠을 밝히는 빛을 “느끼게”도 합니다. 욥을 꾸짖고 싶지 않은 아침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움이 어디선가, 언젠가는 올터이니 또 견디고 견디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겨울은 참 춥고 길고 어둡지만 봄이 오면 겨울은 물러나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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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만일 욥과 같은 형편에 있다면 욥 보다 더 불평을 하고 주님께 원망을 했을것 입니다.
    심한 피해 망상증에 걸려 모든 위로와 조언이 위선과 모독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때 주님께서 같이 힘들어하시고 어려워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기억
    하기를 원합니다. 마땅히 죽을 저희들을 위해 수모와 멸시와 극 심한 고통으로 물과 피를
    쏟으신 십자가의 사랑을 잊지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웃과함께 축복의길 구원의길
    십자가의길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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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욥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생각해 봅니다,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불평하며 매 달리는 욥의 믿음에 감동을 합니다, 혹 내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난 벌써 원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을 버렸을 것입니다, 주님 허약한 내 믿음을 책망하시고 긍휼이 여겨주십시요, 사탄의 시험에 내 맡기지 마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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