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장: 충고가 비수가 될 때

해설: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해 욥이 답합니다.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욥은 스스로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당해 온 고통이 너무 무겁고 크기 때문입니다.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극한의 고통이 오래 지속되자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과녁으로 삼고 활을 쏘는 것처럼 느낍니다(4절). 그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를 구합니다(8-10절). 하지만 그분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자신이 그 정도의 고난을 벌로 받을만한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10절).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기력이 쇠잔 해졌기 때문입니다.

14절부터 30절에서 욥은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냅니다. 그는 지금 친구가 가장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친구들은 마치 와디(사막에 있는 물길로서 평소에는 말라 있다가 비가 내리면 홍수가 나는 곳)처럼 자신을 더욱 절망하게 만들 뿐입니다(15-20절). 그는 친구들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무엇을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21-23절). 그런데도 그들은 욥을 찾아와 구하지도 않은 충고를 안겨 줍니다. 친구를 생각하여 말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위로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저자는 욥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소리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2:12)고 썼고,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2:13)고 썼습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친구의 고난에 이 정도로 깊이 동참해 주는 사람도 보기 드뭅니다. 가장 좋은 위로는 그 사람이 당한 아픔을 같이 아파해 주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위로의 기본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애도의 기간이 끝난 후에 일어납니다. 일 주일 동안 친구들은 심정적으로 욥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애도의 기간이 끝나면서 서서히 마음을 떼어 욥과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공감의 자리에서 관찰자의 자리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러자 물이 흐르던 와디가 말라버리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흐르던 연민의 감정은 말라 버리고 냉정한 분석과 충고가 이어집니다. 그들은 욥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 것이지만, 그 말은 욥의 마음을 후벼 파는 칼날이 되었습니다.

질병이나 사고 혹은 상실로 인해 고난을 당해 본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당한 고통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특별히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대상화 하고 평가하고 심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슬픔을 당한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성령의 위로를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4 thoughts on “욥기 6장: 충고가 비수가 될 때

  1.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고 그 사랑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 고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품어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절망속에서 허덕이는 친구에게 끊임없이 위로가
    되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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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심한 고통이나 불행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갈절히 기도하지만 끝내는 스스로 목슴을 끊는 경우를 보며 자살의 경우에 하나님은 어떻게 받아드리나 궁금하던차에 욥을 통해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지혜로써는 견뎌내기 힘들거나 도처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고통속에 허맬 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끝까지 견디어 내는 믿음이 참 믿음이지만 내 안에는 어드정도의 믿음이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터무니 없이 부족 한 내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조금씩 성장하는 믿음으로 은총내려 주십시요, 욥을 통해 자신을 점검해 볼수있는 기회주신 것 감사드리며 한줌의 믿음이라도 더 담아내는 하루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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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말이라는 권세가 얼마나 큰지요. 혀 안에 독이 있다라는 말,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 있다는 말, 사사소소한 이 진리들이 오늘 참 마음속에 다가 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상대방이 의도하며 한 충고는, 그 충고가 조언으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의도없이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말이 오히려 좋은 충고나 조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도 공감의 자리에서 관찰자의 자리가 이동하는 것이 아닌, 공감의 자리에만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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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펜은 칼보다 강하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라는 말은 사고, 언론, 정보 등이 물리적인 힘이나 폭력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를 따라 가면서 말에 과연 무슨 힘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위로를 하겠다고 시작한 말인지 몰라도 실제로는 추궁처럼 들립니다. 욥에게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 주변에 욥처럼 기막힌 상황에 놓인 친구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겠나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합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깊은 파도 같이 몰려든 슬픔 속에서 숨 쉬는 것 조차 힘이 드는 사람에게, “내 소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치셔서 그 손으로 나를 죽이시는 것 (9절)”이라는 사람에게 말도, 펜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자기를 동정하지 않는 친구가 욥은 몹시 서운합니다. 물이 있었던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사막의 와디 시내처럼 수십년 쌓인 우정도, 부부의 의리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욥은 지금 마음을 둘 곳이 없습니다. 자기 편이 없는 철저한 고독 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엘리바스처럼 누군가를 위로해 주어야 할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내 눈에 보이는대로 말하지 않고, 타자의 자리에 같이 서는 공감의 지혜를 구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내것처럼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공감력이 있어야 친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내 감정, 내 의견만 앞세우는 이 시대에 욥의 친구가 되는 크리스찬으로 살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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