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장: 진실은 잔인하다

해설:

일 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욥과 함께 애도하던 친구들이 욥의 저주 섞인 탄식을 듣고 드디어 입을 엽니다.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입니다(1절). 

그는 먼저 욥이 불행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말로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과거의 일을 상기시킵니다(2-4절). 그랬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불행을 당하니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습니다(5절).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의 믿음이 모두 사라진 것이냐고 묻습니다(6절).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엘리바스는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7절)라는 질문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표현합니다. 10절과 11절에 언급된 “사자”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8절)에 대한 비유입니다. 악한 자들이 잠시 동안 발호하지만 결국은 “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들”(9절)입니다.

이어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영적 경험을 나눕니다(12-21절). 12절과 16절에 묘사된 환상을 통해 그는 “죽은 듯이 조용한 가운데서”(16절) 미세한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간의 죄스러움에 대해 말합니다(17-21절). 그 음성을 들을 때 엘리바스는 뼈가 흔들릴 정도로 “두려움과 떨림”(14절)에 압도 되었고 그 음성은 “악몽처럼”(13절) 그를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각할 때면 두려움에 압도되게 마련입니다.

묵상:

모든 진실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진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헛되게 살아 왔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잔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마주할 때면 그 떨림이 더욱 크고 무겁습니다. 엘리바스는 환상 중에 들은 미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깨달았을 때 “뼈들이 막 흔들렸다”(14절)고 말합니다. 죄 된 인간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려움에 질릴만한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이 입김을 불면 거대한 산맥도 날라가고 깊은 바닷물도 말라 버립니다. 그런 능력으로 하나님은 악한 이들을 심판하시고 신실한 이들을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항의할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았다면 그분의 은혜로 받은 것이며, 재앙을 당했다면 마땅한 보응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 말로써 엘리바스는 욥에게, 저주의 말을 거두고 재앙을 당한 직후에 했던 고백(1:21; 2:10)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가 그런 재앙을 당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4 thoughts on “욥기 4장: 진실은 잔인하다

  1. 내 안에 있는 지난 과거의 생각과 행실을 진실의 거울에 비취어보며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회상하니 부끄러움이 앞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위로해 주려왔다면서 덥어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진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며 정죄하는 말들로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붓는데 나도 아려움을 당한 사람을 만나며 우선 진실이 무언가 설명해 주고싶은 심정이 앞서는 것을 한두번 느낀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근본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조율하며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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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부끄럽지만, 내 안에도 엘리바스와 같은 생각과 행동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진실은 아픔을 수반하기도 하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원리로 사람들에게 잔인한 말과 생각으로 휘두렀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과응보의 원리를 진실이라는 포장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들의 준거틀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상황과 나의 준거틀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들의 상황과 준거틀에서 공감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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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에도 읽은 욥기인데 이처럼 문학적 향기가 짙은 책인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은 “왜”라는 질문에 어떻게든 답을 하고 싶어 합니다. 질문을 하게 하는 상황보다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더 못견디는지도 모릅니다. 욥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한 친구들이 그 “왜”를 풀어 보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회개할 것을 빨리 찾아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고통이 물러가게 하는 길은 회개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어색합니다. 흥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고통이라는 벌을 주시니 나는 회개라는 제물을 바치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나님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밖에 안됩니다. 고통을 벌이 아닌 선물이나 은혜로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고통은 유익한 것이니 잘 참으면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말은 맞지만 남에게 하지는 쉽지만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듣고 싶지 않습니다. 욥은 벌써 엘리바스와 같은 생각을 여러번 했을 것입니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이걸 모를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문제)을 사람이 이해 (답)해 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데도 탑을 높이 쌓으면 하늘까지 닿을줄로 알고 쌓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애를 씁니다. 그냥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요. 엘리바스가 그리는 하나님은 무섭기만 합니다. 18절에서 “자기 종들도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들 중에서도 허물을 찾으신다”는 분입니다. 개역개정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주인이라면 맡은 보물을 땅 속 깊이 묻어두는 종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보며 화가 나신 하나님, 욥에게 못마땅한 하나님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영적인 경험은 하나님의 일부 만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의 하나님 체험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친구와 멀어지게 만듭니다. 내가 전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고통 받는 사람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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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적어도 욥의 친구들은 위로(?) 하기전에 1주일의 긴시간을 욥과 같이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친구를 위해 긴 시간을 들이지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하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의 모든 언행이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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