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장: 속 마음을 드러내다

해설:

독자는 2장과 3장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모델 인간’이었던 욥이 ‘축복의 모델’처럼 살다가 ‘불행의 모델’처럼 모든 것을 상실하고 건강마저 잃어 버립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피조물로서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축복이든 재앙이든) 받아 들이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먹구름처럼 형성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이성이 그의 감정을 다스렸지만,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지면서 감정이 그를 압도합니다. 평안하고 건강하게 사는 동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악한 감정이 하나님을 향해 솟구칩니다. 욥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억눌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억누를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이 분노입니다. 결국 그는 입을 열어 그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1절부터 12절에서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던 날이 달력에서 지워져서 자신도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말았어야 한다고, 혹은 모태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혹은 태어났을 때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그랬더라면 지금 겪는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부터 19절 까지에서 욥은 죽음의 상태를 그리워합니다. 죽음의 세계에는 누구도 차별이 없습니다. 더 이상의 활동도 없고 그래서 고통도 없습니다.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자유를 누리는 곳입니다. 그는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끝내고 죽음의 세계로 가기를 원합니다.

20절부터 26절 까지는 극한의 고통 중에서도 계속 생을 이어가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신도 저주하며 스스로 생을 끝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생명을 가져가기 까지는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심정을 욥은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23절)라고 절규합니다.

묵상:

상실과 질병의 재앙을 당한 직후에 욥이 드러냈던 믿음은 배워 알았던 믿음이었음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온갖 축복을 누리는 동안에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이 공평하다면 자신에게도 언젠가 고난이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마침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밀어닥치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일이 다가오고야 말았다”(25절)고 토로한 것입니다. 아들 집에서 잔치를 즐길 때마다 자녀 하나 하나를 위해 번제를 드린 것(1:5)도 그런 불안감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워했던 일을 당하고 나서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동안 누린 복도 자격 없이 누린 것이므로 지금 당하는 재앙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더 깊어지고 길어지자 그의 이성은 작동을 멈추고 마음의 감정이 압도합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에게 분노를 쏟아 놓지는 않습니만, 생을 비관하고 죽음을 동경합니다. 13절부터 19절 까지에서 욥이 한 말은 우울증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기 위해 몸부림 칩니다. 

4 thoughts on “욥기 3장: 속 마음을 드러내다

  1.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고통과 암울함은 극에 치달았습니다. 말 그대로 심신이 약해지니, 감정이 욥을 압도하면서, 자신을 저주하게 됩니다. 욥기 3장을 읽어보면, 이런 문구가 생각이 납니다. “말은 상징을 이야기하며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은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욥의 저주와 고백은, 얼마나 욥이 두렵고 아파하면서 고통 가운데 몸부리치고 있는지, 또한 그의 말의 의미가 불평과 저주 그 이상으로 “불안하니, 도와달라:” 라는 의미로 이해가 되어집니다. 주의를 둘러보면 마음이 아프고,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상황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외침에, 말의 의미를 이해하며 위로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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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확고 부동한 믿음을 원합니다. 사랑 이시고, 좋으시고, 신실 하시고, 구원의 주님을 꼭 붙잡고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생각하는 축복에 너무 호들갑을 떨지말고 세상에서 의 재앙이
    잠시인것을 깨닫고 감사히 이겨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생각과
    마음과 말과 행동과 삶에서 불평하지않고 은혜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영원한 천국 잔치를
    기리며 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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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바로 며칠 전 한국에서는 젊은 코미디언이 피부병을 앓다 엄마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공해와 생활습관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부질환이 많아졌습니다. 남편과 나도 시시때때로 가려움증과 이상 발진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가도 피부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한국처럼 공중 목욕탕이 있다면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들 멀찌감치 떨어지려할 것이라는 농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욥의 한탄을 읽으니 나의 마음도 같이 울적해집니다. 자식과 재산을 잃고도 정신을 잃지 않았는데, 깨진 기왓장으로 몸을 긁을 때 손목을 그어버리고픈 충동을 느꼈을만도한데, 그는 고통 속에 계속 앉아 있습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 속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했었다는 해설 말씀이 금새 이해가 되는 한편 울적함을 불러 일으킵니다. 모범적인 사람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될 때 느끼는 이상한 배신감 같기도 하고, 벼락처럼 내려온 고통의 무게에 등떠밀려 벼랑 끝까지 온 사람의 심정을 보는 것 같아 느끼는 비애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만 언제 거두어 가실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서 제사를 열심히 올렸다면 그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왜 그를 흠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셨을까 하는 볼멘 질문도 나옵니다. “학습된 믿음”은 외양만 믿음일 뿐 자기최면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탄이 욥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결론은 더더욱 싫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임하였고, 무서워하던 모든 것이 닥쳤구나 (25절)” 하는 탄식은 사탄이 기다리던 반응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놓고 두려움을 정당화하는 사건만 보게 만드는 사탄의 계획이 먹히고 있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보다 못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탄의 장난에 화가 나는 아침입니다. 탄식하는 동안 만이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탄식하고 저주하며 이 시간을 넘기라고 욥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욥이 불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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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욥읋 통해 인간의 이성과 감성 간의 부조화를 읽으며 인간의 한계를 통감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나한테 닥쳐왔다면 난 아마 하나님께 의존하기 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욥의 당연한 불평을 인지하며 난 얼마만큼 하나님께 의존하며 사는 가 스스로 물어 봅니다.
    감당할수있는 시험만 주신 다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욥을 이해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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