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5장: 경제 정의를 위한 법

해설:

모세는 십일조에 대한 지침에 이어 안식년에 대한 지침을 제시합니다. 안식년에 대한 규정은 출애굽기(23:10-11)와 레위기(25:1-7)에 나오는데, 이 규정에 의하면 칠 년마다 땅을 경작하지 말고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거기에 더하여 채무 청산을 요구합니다. 매 칠 년이 끝날 때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이 있으면 탕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4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욱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4-6절). 

안식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돈을 꾸어 달라고 하면 그 돈을 돌려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고려하여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9절). 모세는 그런 상황에서도 인색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가 당신들을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당신들이 죄인이 될 것”(9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궁핍한 동족의 필요를 모른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바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의 생존이 위태로와지지 않게 서로 살피고 도와야 합니다(11절).

레위기 25장에 보면, 희년 즉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후 50년째가 되는 해에 종을 자유하게 해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일을 안식년에 하도록 요구합니다(12-18절). 종을 자유하게 해 줄 때에는 재산도 딸려 보내야 합니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일 그 종이 자원하여 계속 종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허락해야 합니다(16-17절).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묵상: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4절)라는 말에서의 가난과 “그렇게 한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11절)이라는 말에서의 가난은 의미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4절의 가난은 ‘핍절'(destitution)을 의미하고 11절의 가난은 상대적 가난(poverty)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죄성에 물들어 있는 한,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법이나 제도로 평준화 시키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이상입니다. 이 이상은 이미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시하신 이상적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도 아니고 카지노 자본주의 사회도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 하고 그 소득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살피고 돌아보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삼년 마다 소득의 십일조를 모아 구제금으로 사용하게 하고, 칠년 마다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를 해방 시키며, 오십년 마다 다른 사람에게서 사들인 토지를 돌려 주게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빈부의 차이는 존재 하더라도 생존에 위협을 받는 사람을 없게 하고, 부와 가난이 대물림 되지 않게 했습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경제적 이상입니다. 이런 이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각자 자신의 이웃을 돌아 보고 우리 사회의 경제 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 thoughts on “신명기 15장: 경제 정의를 위한 법

  1. 6월 10일자 한국일보 “이지선의 공존의 지혜” 컬럼에서 이지선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애자 3분의1 이상은 차별당했다라고 하는데 일반인의 88%는 차별한 적 없거나 의식하며 차별한 적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문제는 차치하고, 일단 사람은 자신이 부당하게 당한 일은 기억하는데 남에게 부당하게 한 일은 느끼지도 못 하고 잘 기억하지 못 한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생각은 위엣말과 상관되면서 정반대되는 “나의 기억력”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베푸셔서 살게 된 일들을 잊어버리고 살면서 내가 남에게 조금이라도 베푼 것은 정확히 기억합니다.무숙자를 위한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나 추운 겨울 임시로 제공하는 쉘터에서 봉사할 때 적잖은 경우 베푸는 자로서의 우월감이나 그곳에 오는 이들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판단하는 자신을 보면 그러합니다.
    실제로 그런 곳에 오는 이들중 대부분은 “저러니까 이렇게 되지”라는 생각이 들게끔 합니다. 공짜로 먹는 식사의 맛을 평가하고 주는 대로 받지 않고 골라 먹으려 하고 셀폰으로 다른 무숙자들과 오늘 여기 메뉴는 이런데 그쪽 메뉴는 무언가 연락하기도 하고 한 테이블에 앉아 먹다 수틀린다고 싸움박질하고 고기 한 점 덜 준다고 봉사자에게 시비걸고—.
    그런 걸 보며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돌아봅니다. 나는 “매순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그 앞에서 겸손하며 받는 은혜에 항상 감사”하는, 베품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고 기회만 있으면 내 좋은 대로 하려 하고 그래서 넘어지면서도 깨닫지 못 하고 다시 또 같은 길을 가고, 은혜로 살아감을 까맣게 잊고 내 능력인 줄 착각하며 잘 되거나 남에게 베풀 때 오만한 자리에 섭니다.
    이런 나를 보며 하나님을 조금 더 알아갑니다. 보니까 예쁘기 때문에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게 아니고 늘 하나님 보시기에 가슴 아픈 일만 하는데도 끊임없이 돌보시며, 죄에서 구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거저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15절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힘들 때 직접 주신 은혜와 다른 이들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손길을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을 갖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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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요한 웨슬레의 경제 관념을
    갖기를 원합니다. 청지기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때에 더욱더 굶주림에
    시달리고 핍박 받는자들을 이웃과함께 찾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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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요즘엔 더욱 가난과 차별, 오만 등을 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숨이 나옵니다. 내 안에 있는 오만, 타인을 향한 무정한 마음, 나누고 베푸는 데 인색한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주님의 넉넉한 마음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그 은혜와 사랑을 나눌 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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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본문말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7년을 주기로 모든 빛을 탕감하라고 하십니다. 빛이 생긴게 1년전이든 6년전이든 같은 날짜에 탕감하는 거죠. 현대경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생각해봅니다. 만약 그런 제도가 있다면 탕감날이 가까워 질 수록 돈을 빌려주는 경우가 드물테고. 빌려줘도 소액에 짧게만 빌려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행위를 잘못됐다고 본문은 꾸짖습니다. 

    빛의 목적도 중요합니다. 본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타국인을 위해 돈을 빌려주라고 합니다. 다른 의미로 먹을게 없고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투자비용이나 비싼 옷을 입기위한 빛이 아닌 거죠.  

    이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있습니다. 그 자원의 분배가 너무나 한쪽으로 쏠려있어서 그걸 막는거죠. 인류의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죄의 습성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7년째 빛을 탕감해주는 제도의 본질은 어찌보면 우리가 매주 안식일을 가지라는 규율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씩 삶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 마음 내키는데로 살겠죠. 이번 휴일을 맞이하며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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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 할 당시 무소유자들로써 하나님이 분배해 준 재산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7년 후에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현실에서는 날 때부터 현저한 차이를 갖고 시작하기 때문에 원점으로 되 돌리는 것은 상상조차 이렵지만 요즘 흔히 말하는 경제 민주화는 경제의 정의로운 평준화를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궁핍한자들을 서로 도우며 모든 세금을 착실히 내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 듯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 않고 나라도 구제 못 하는 현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을 옳바로 혜아려 최선을 다도록 주님의 인도를 간구합니다, 갈수록 불평등 한 세상을 보면 때론 절망과 우울이 만연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과 지혜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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