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편: 깊은 물 속에서

해설:

열한 번째 순례자의 노래는 라틴어 번역본을 따라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라는 제목으로 널리 사랑 받아 온 참회 시편입니다. 

시인은 “깊은 물 속에서”(1절) 이 기도를 올립니다. “깊은 물”은 시인이 처한 죽음의 깊은 계곡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원수들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혹은 심리적인 공황 상태로 인해 시인은 물속 깊은 곳에 빠진 듯한 상태에 있습니다. 물 속에 빠져 질식할 듯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구절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절망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망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청합니다(1-2절).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며 시인은 자신의 죄를 기억합니다. 죄로 인해 그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죽기 전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속속들이 죄로 물들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3절).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용서하실 분도 하나님 뿐이십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용서에 너그러우시고 빠르신 분입니다(4절).

그렇기에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5절). 죽어도 하나님의 음성만 듣는다면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6절)합니다. 파수꾼은 밤새도록 성을 지키면서 추위와 피로와 두려움에 떨어야 합니다. 새벽이 가까워질 때 그들은 동이 트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권합니다(7-8절). “인자하심”(7절)은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입니다. ‘헤세드’는 헬라어 ‘아가페’처럼 조건 없고 변함 없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분은 회개하는 심령들을 “모든 죄에서 속량”(8절)하십니다. 

묵상:

인간성의 바닥에 이르면 결국 죄와 죽음만 남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국 인간의 모든 두려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이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잊고 살기 위해 방책을 궁리합니다. 두 가지를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바닥에 깔아 두고 그 위에서 서서 다른 것들로 마음과 생각을 채웁니다. 그러면서 의롭고 거룩한 존재인 것처럼 가장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스스로를 속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교만과 오만의 원인이며, 그것이 우리의 헛된 몸부림의 이유입니다.

고난은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를 속여왔던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인생의 바닥에서 우리는 집요하게 외면하고 무시했던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마주합니다. 이 때, 부를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때, 의지할 대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이름이 허접한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십자가에서 영원한 사랑을 확인해 주신 그분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4 thoughts on “시편 130편: 깊은 물 속에서

  1. 낮설고 물설었던 죄와 죽음에 대해 오늘 말씀 속에서 시인의 자백을 통해 이제는 내 곁에 와 있는 죄와 죽음을 음미하며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의 분량을 생각합니다.
    내가 깊은 물 속에서나 어둔 골짜기에서 헤맬 때는 주님마져 잊고있었지만 지극히 인자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리를 찾고 주님 앞에 나가 참회의 기도에 응답하신 주님의 자비에 감사 드립니다.
    파수군이 아침을 기다림 같이 이번 노불 코비드를 빠른 시일내에 해결해 주실것을 기다리며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무사한 하루가 되기를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아침 시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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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 있는 저의 교만과 죄악들을 용서하소서. 주님의 궁휼하심을 한번더 허락하시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합니다. 고난앞에 나의 죄를 알려주시고, 기회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를 경외 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오늘 말씀 앞에 설때, 시편 저자의 심정처럼, 물에 빠져있는 느낌이 듭니다. 내 삶의 아픔과 가족의 어려움 가운데 우리가 의지할 뿐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이 구원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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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바닥을 쳐야,” “맨 밑바닥까지 가야”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까지 내려간 뒤에야 반등의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깊은 물 속에 그냥 가라앉아 버리는 순간과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순간을 구별하는 경계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코비드-19 최전선에서 일하던 젊은 의사가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뉴스를 대하면 마음이 정말 안 좋습니다. 육신의 질병도 이겨야 하지만 정신 또한 튼튼해야 합니다. 타인의 건강을 찾아주는 사이에 정작 자신의 정신은 병들어간다면 무슨 소용인가…한스 로슬링의 “factfulness” 책에서 뉴스는 속성상 부정적인 이야기를 다룰 때 가치가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Good news is not news. Good news is almost never reported.” 로슬링은 이것을 부정적인 것에 끌리는 사람의 본능 (negativity instinct) 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이 갖고 있는 죄성의 증세겠지요. 따라서 나쁜 뉴스를 들으면 그에 못지 않게 좋은 뉴스도 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이 복잡한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지혜라고 알려줍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사태에 몸과 마음이 상해 갑니다. 집에만 있는데도 피로가 쌓이고,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데도 정신 소모는 여전합니다. 너무 많은 변화를 너무 급하게 소화해 내려니 혼란스러워서 흔들리는걸까요. 온 세상이 바닷속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 같은 지금 싶은 심연에서 부르짖는 기도에 내 마음도 실어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주의 말씀에 나의 소망을 둡니다…하나님 어서 새벽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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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죄와 죽음 사이에서 허덕 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을 강한손과 편 팔로
    깊은 물속으로 인도하셔서 주님께 부르짖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신 세상을 잘 다스리지 않고 계속해서 환경 오염에 신경을 쓰지않는 저희들을
    우한 폐렴으로 시내 공기가 깨끗케 하신 주님의 사랑에 예배를 드립니다.
    코로나 사태로 범죄가 줄어지는 은총에 찬송을 드립니다.
    그러나 모두들 같이모여 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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