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47-75절: 가야바 법정에서

해설: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로 오십니다. 그 때 가룟 유다가 성전 경비경들을 데리고 다가옵니다(47절). 어둠 속에서 예수님께 다가 가 유대식으로 입을 맞추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자 경비병들이 달려 들어 예수님을 결박합니다(50절). 그 때 제자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들어 그들을 향해 내리쳤고 그로 인해 그들 중 하나의 귀가 잘려 나갑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제자의 행동을 제지 하십니다(52절). 그분은, 경비병들을 제압할 능력이 당신에게 있지만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순순히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54절). 그 때 제자들은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황실은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 했지만 산헤드린이라는 자치 의회에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해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 사이의 문제들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형만큼은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체포된 예수님은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이송되었는데(57절),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의회가 소집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몰래 가야바 법정까지 따라갑니다(58절). 그는 정체를 숨기고 하인들 틈에 끼어 되어가는 일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죄를 찾던 중에 두 사람의 증인이 나서서 그분이 성전을 모독했다고 고발합니다(61절). 가야바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63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하였소”(64절)라고 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절반의 긍정과 절반의 부정을 담은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64절)라고 말합니다. 가야바는 지상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온 우주의 영원한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이 대답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해석합니다(65-66절). 온 의회는 가야바의 해석에 동조하여 사형을 결정합니다. 사형수로 결정되자 의회원들은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예수님을 조롱합니다(67-68절).

그 때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베드로에게 하녀 한 사람이 다가와 그의 정체를 폭로합니다(69절).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부인합니다. 위기를 느낀 베드로는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대문 가까이로 옮겨갑니다. 그러자 다른 하녀가 그를 알아 봅니다. 베드로는 다시금 부인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그의 말투가 갈릴리 억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의혹을 부추깁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74절) 부인합니다. 그러자 멀리서 닭이 웁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들은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 나 바깥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75절).

묵상: 

대제사장이 서 있는 재판정에서는 예수께서 서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죄를 고소하는 사람들의 말에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변명한다고 해서 그 운명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운명을 피할 일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정체를 캐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숨김없이 답합니다. 이제까지 숨겨 왔던 당신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재판정 저 아래에는 베드로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불을 쬐면서 흘끔흘끔 예수님의 재판 광경을 훔쳐 봅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고 용기를 내어 재판장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그 때 대제사장의 하녀 한 사람이 그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 부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합세하자 그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관계를 부인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이렇게 다르게 행동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실재였고 하나님 나라는 현실이었습니다. 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직 하나의 개념에 머물렀고 하나님 나라는 가설일 뿐이었습니다.  

안부

그동안 뉴스로만 들어 왔던 코비드-19에 관한 이야기를 뉴욕과 뉴저지에 사시는 목사님들을 통해 전해 듣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간 한인들 이야기, 장례식도 하지 못한 가족들이 진단조차 받지 못하고 두려워 떠는 이야기 그리고 병원의 무질서와 무책임한 처사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도 머지 않아 닥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힘은 실재이신 하나님 그리고 현실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죽음은 없다”고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 죽음은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해도 걱정 없도록 믿음을 든든히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 목요일’, 손 모아 사귐의소리 가족들의 안부를 위해 기도 드립니다.

5 thoughts on “마태복음 26장 47-75절: 가야바 법정에서

  1.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계획한 과정 대로 이루어 지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대 제사장 앞에 떳떳이 서서 조금도 망서림 없는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 같이 이런 위기 사황을 맞을 때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열악한가를 배웁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베드로와 같은 행동을 했거나 한 술 더 뜨지 않았겠나 자책해 봅니다.
    몹시 울은 베드로를 수제자로 선택하신 주님의 애정을 생각하며 진실된 참회속애서 주님을 따르며 제자가 되는 베드로를 배우며 몹시 우는 내 자신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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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베드로의 모습이 한없이 제 모습과 오버랩이 됩니다. 말로는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잘 이야기하고, 선포하지만, 제 삶에서는 그 하나님께서 실재가 되어지지 않음을 회개합니다. 두려움과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제 몸안의 백신인 믿음이 더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그 실재되신 하나님이 나와함께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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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난날에 주님을 배반하고 바라바를 풀어주는 무리의 한사람이있고, 주님을
    넘겨준 유다였고, 비겁한 베드로였음을 고백합니다. 지금 부터라도 침묵으로
    순순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가 되기를 원 합니다.
    이웃과함께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믿음의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수있는 시간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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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그들이 상상했던 메시아는 과거에 사사와 왕들이 그랬듯이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고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차원이 다른 메시아를 얘기하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서 그들에게 영생을 줄 구원자였습니다.

    제 믿음은 요즘들어 더 자주 바닥을 칩니다. 아무래도 미국전역으로 퍼지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제 마음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바이러스에 노출, 감염, 아픔, 그리고 죽음까지 생각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존재와 힘이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런 깊은 묵상을 하지 못해서 그분의 존재와 힘을 잊게 되는거죠.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에 넘겨졌을 때 권력자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 했습니다. 자신이 보았던 자신의 스승이 보여줬던 기적과 환상도 잊고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도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베드로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연약한 믿음을 가졌으니까요. 그런 시험을 맞이하기 전에 제 믿음이 더 뿌리를 내리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의 껍질을 뚫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시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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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수님은 그저 당하고만 계십니다. 별 말씀도 없고, 저항도 안 하십니다.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들”을 청하는 기도도 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잡혀가십니다. 거짓 증인들이 나와 떠드는 중에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만 몰두하실 뿐입니다. 가장 소극적인 모습으로 가장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할 수도 있고 베드로처럼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답이 달라지고 두려움을 못이겨 어떻게든 그 순간만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고난 주간이 특별한 것은 묵상과 기도로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서 보고,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예수님의 외로움을 느껴보고 또 날라 오는 모독과 인신공격도 상상하며 참고 또 참아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청을 다 들어 주셨습니다. 아프다면 고쳐 주시고 배가 고프다면 먹여 주시고, 억울한 속을 풀어주시고 캄캄한 앞날을 희망으로 열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로 사는 사람도 똑같이 대해 주셨고, 똑똑하게 잘 알아 듣는 사람이나 수준이 낮은 사람이나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상황과 태도는 한결 같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사랑은 늘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넉넉했습니다. 팬데믹의 환난을 지나며 예수님과 더욱 가까와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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