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31-46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

해설: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날이 이르면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영원한 왕은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가를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34절)입니다.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34절)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대로 그 영원한 나라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다시 오십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는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35-36절).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 드렸느냐고 반문합니다(37-39절). 그러자 예수님은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40절)이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내 형제자매”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의미가 이 말씀에 들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첫 번째 의미를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대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이 드러내야 할 차별성입니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희생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해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하시며 “악마와 그 졸개들의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고 하십니다. 그들이 인자의 심판에 대해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두고 “그렇다면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론을 밝히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고 그분의 뜻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살피고 채우는 일에 마음을 쓰고 물질을 사용해야 옳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고, 믿음의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이 비유에서 우리는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40절)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롬 8:29)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맏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형제자매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분을 등지고 사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들을 집을 떠난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집 안에 있는 자식이나 집을 떠난 자식이나 모두를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성자 예수님도 그들을 “내 형제자매”라고 부르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닙니다. 형제자매의 기쁨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또 하나 주목할 표현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인간적인 혹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표현합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절대적 가치로 보십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조건에 근거하여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여기시는 주님은 누군가가 세상적인 조건 때문에 차별 당하거나 무시 당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참된 믿음은 누구를 대하든 아무 차별 없이 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힘쓰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면서도 그 사람이 하찮아 보인다고 하여 외면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외면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5 thoughts on “마태복음 25장 31-46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

  1. ” 내 형제 자매” 그 중에도 지극히 작은 사람, 무심히 읽었던 구절였지만 오늘 마주해 보니 주님의 말씀 속에 숨어았는 예리한 칼날의 양면을 생각합니다, 내가 인종적이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을 때 느끼는 증오가 바닥에 깔려 있으면서 때때로 내 자신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묵살하며 살고있습니다, 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그들과의 감정 이입이 되도록 낮아지기를 구하며 ” 주님이 말씀하는 평등”을 깨달고 내 가치기준이 새로와 지기를 간구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고통받고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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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 제 안에 있는 선입견과 판단함을 봅니다. 내 기준과 의와 다른 행동과 태도가 있으면 가차없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제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제 마음을 궁휼하게 여기시고 정결하게 하소서. 권력있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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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내게 껄끄러운 사람, 세상에 사는 모든사람은 모두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병자, 굶주리는자 헐벗은 자 핍박받는자를 돌보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지혜를
    원 합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물리치신 주님. 제마음속에 욕심, 교만,
    시기 질투 미움을 물리치는 믿음이 필요 합니다. 절제와 근신과 섬김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코로나 사태와 고난 주간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함께 모여 주님께 예배드릴수 있는
    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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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타인의 형편을 살필 줄 아는 사람. 타인에 대한 염려가 가능한 사람.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좋은 사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이 정지한 지금 자연이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바쁘게 살면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과 만날 수 없는 것이 큰 불편이요 괴로움이지만 그들의 안녕이 나의 안녕처럼 느껴지는 것은 팬데믹이 가져온 의외의 보너스입니다. 이웃과 섞여 부딪치고 닳아지면서 살아갈 수 없는 때에 읽게 되니 오늘 본문은 행동에 앞서 선한 의지와 의도가 있는지를 먼저 묵상하게 합니다. 본문에서 의로운 사람도 악한 사람도 “언제?” 그런 주님을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이 배고파 하는데 먹을 것을, 목말라 하는데 물을 드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라고 봤다면 분명히 했을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왼편 오른편으로 갈리는 것은 주님한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것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입니다.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타인을 보는 마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앞서거나, 판단하는 이성이 앞서거나…아프리카의 배고픈 어린이에게는 선뜻 수표를 쓸 수 있지만 신호대기에서 보는 홈리스한테는 일 불을 주는데도 망서리고 또 망서립니다. “소셜 디스탄싱” 구제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 구제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서?) 한 번이라도 하겠나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라. 누구나, 아무나” 쯤으로 제목을 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이러스가 진정되고 거리에 다시 사람들이 넘쳐날 때, 오늘 말씀이 잘 생각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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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어렸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던 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읽었습니다. 일제에 대항해서 싸우다 죽었던 열사들과. 전쟁 중에 적군의 수류탄을 끌어안아서 부대원을 지켰다는 이야기. 그때만 해도 저도 기회가 된다면 그런 멋진 위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희생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계산을 하고 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사회가 여기는 선을 넘은 희생을 얘기하고 게십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를 넘은 희생입니다. 그시대 때 지극히 낮은 사람 한명을 위해 배풀라고 얘기하십니다. 보상이나 인정도 없는 희생인거죠. 그러나 그 희생은 억지로 쥐어짜서 나오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 전부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통해 우리 죄를 대속했고. 그 아들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 믿음 말이죠.

    지금 미국은 위기입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 싶지만 보건시스템 여기저기서 이때까지 골았던 고름이 터지고 있습니다. 거기다 40년 넘게 심화되었던 불평등의 고름도 2008년에 이어 다시 터졌습니다. 앞으로 적어도 몇달 동안 많은 이들이 아프고 어려워할텐데. 그런 고통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도 없습니다. 이런 위기속에 우리 마음을 진정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도울 수 있는 기회에 도울 수 있는 용기 주시고.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일하고 있는 가족, 친구,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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