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1-39절: 악의 도구가 되어 버린 종교

해설:

거듭 된 논쟁을 통해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대제사장들, 사두개파, 장로, 율법학자, 바리새파 등)을 침묵시킨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허위와 위선과 불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집중하십니다. 그들이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로 자처하고 있었기에 “모세의 자리에 앉은”(2절) 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율법을 따라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기를 좋아하고, 대접 받고 높임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랍비”, “아버지” 혹은 “지도자”(7-10절)라는 경칭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사실(8절)을 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가장 낮은 곳입니다(11-12절).

예수님은 그들의 모순되고 위선된 행실을 생각하면서 탄식하십니다(13절). “너희에게 화가 있다”라는 말은 탄식입니다. 그들의 현재 모습과 그로 인해 그들이 직면하게 될 미래를 생각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 멋대로 왜곡시켜서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13절),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길로 인도합니다(15절). 그들은 또한 율법을 가르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소홀하게 만들고 덜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16-22절).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얻을 이익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23절) 같은 것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하면서도 “정의와 자비와 신의”같은 덕을 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합니다. 그들은 경건하게 보이려고 외양을 꾸미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합니다(25절). 그것은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썩은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27절). 

그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위인들의 기념비를 꾸미는”(29절) 일에 열심입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예언자들을 박해 했던 조상들을 비난 합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들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하는 행동은 과거 조상들의 행동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생각하면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32절)고 하십니다. 그 죄의 분량이 다 차면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33절).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를 부르십니다(37-39절). 여기서 ‘예루살렘’은 유대교 종교 권력자들과 유다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죄의 분량이 가득 차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주후 70년에 이루어집니다. 로마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이 “황폐하게”(38절) 된 것입니다. 

묵상:

참된 종교는 인간의 내면을 정화하고 그로 인해 말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변화하면 그를 통해 그 변화가 번져 나갑니다. 종교를 교육하고 전파 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종교가 오히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더 왜곡되고 위선적이며 모순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종교가 자신의 위선과 모순과 탐욕을 가리는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종교는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갈취하는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그런 타락과 왜곡을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보셨기에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 예언자들을 박해 했던 조상들을 생각하면서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위와 모순과 불의와 죄악을 읽으면서 혹시 “나는 그렇지 않으니 다행이네”라고 생각합니까? 혹은 다른 누구를 생각하며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고 깨달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각자는 나 자신을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역기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4 thoughts on “마태복음 23장 1-39절: 악의 도구가 되어 버린 종교

  1.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와 위선자들의 탐욕과 방종이 이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며 많은 청순한 신도들을 잘 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예루살램을 두고 한탄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같은 책망을 하실지 아니면 칭찬을 하실지 생각해 보면 아마 탄식하시는 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진실로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지 아니면 비단 옷을 입고 주님을 마지하려 하는지 반추해 봅니다.
    양성 판단을 받은 우리 두 Staff를 지켜 주시고 자가 격리로 들어가는 저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끝까지 주님 의지하며 이번 전염병과 싸워 이겨내는 인내력을 간구합니다.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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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기도하는 프랜시스 교황의 사진이 심금을 울립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바티칸과 로마라고 상상했는데 그렇게도 완전하게 비어 있는 모습 자체가 충격적입니다.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인간의 종교와 역사를 말할 때 로마의 중요성을 인정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아름답고 슬픈 도성 한 가운데서 홀로 기도하는 교황은 마치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언젠가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 차차 정상으로 돌아가도 한 번 크게 겪은 변화와 그 변화가 일으킨 크고 작은 충격은 우리의 일부가 되어 남을 것입니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인의 삶이 크게 변했듯이 코로나가 진정이 되고 나면 세계인의 삶이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은 물론이요 가족과 친구의 중함, 커뮤니티와 네트웍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고 일상에서 만나는 작고 소소한 기쁨은 백배로 증폭되어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울 것입니다. 이런 신선한 재발견이 얼마나 가겠느냐고 벌써부터 냉소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인생의 크기를 정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부로 남게 될 변화들을 상상해봅니다. 예전에 했던대로 또 하게 되는 일과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일들을 나눠서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어느 칸에 적어야 할까요. 예배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바보 같고 눈이 먼 너희들아!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냐? 제물이냐,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과 제단은 눈에 보이는 것을 뜻할까요. “눈이 먼 너희여, 너희는 모기는 걸러내어도 낙타는 삼켜버린다!” 작은 불의는 골라내면서 큰 죄악은 묵인하고 덮어가며 살지는 않나요. 성 베드로 광장에 정적이 흐르고 교회 문들이 굳게 닫힌 지금이 처음으로 돌아가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하던 때로 돌아가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가던 순간, 세례를 받던 순간, 첫사랑을 기억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주님,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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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겸손이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남들을 속으로 정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무릎을 끓습니다. 생각해도 언제 주님의 형상을
    닮은 제자가 될지 한심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만을 간구합니다.
    Teenager 때 자기들 보다 더 바쁘게 싸 돌아 다닌다고 흉을 보던 딸 들이 코로나
    사태로 자주 전화 통화하며 시간을 보내는것도 하나의 (축복?) 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이 각자가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으로 허락하신것 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다 같이 모여 드리던 예배가 축복인줄 몰랐습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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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의 숨은 마음들 그리고 죄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제 안에 있는 더러운 욕심과 죄들이 낱낱이 드러나니, 부끄러우며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생활이 종교생활이 되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행동에만 변화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변화임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물리적인 변화나 화학적인 변화는 변화는 되어지나, 겉모습만 변하게 되어지며, 그 안의 물질 혹은 재료는 동일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유기적인 변화는 속에서부터 밖으로 서서히 변화되어지는 과정이지요. 예를 들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지고, 겨자씨만한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지듯이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서서히 겉모습까지 바뀌어지는 유기적 변화가 제 삶에도 있기를 원합니다.**

    메세지 번역에서는 마태복음 23장의 소주제를 종교 패션쇼라고 쓰여져있습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옷들만 매번 바꾸면서, 정작 내면은 바라보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패션쇼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며, 또한 내 모습이 보여집니다. 주님! 궁휼을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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