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1-15절: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해설: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1절). 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랐고 거기서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2절). 그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시 예수께 찾아와 걸어 넘길 구실을 찾기 위해 당시의 핫 이슈 중 하나에 대해 질문합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절)라는 질문은 신명기 24장 1-4절에 대한 해석을 요청한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권이었던 당시, 율법학자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 사유를 여러 가지로 규정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예수님의 입장이 어떤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하여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뜻은 ‘영원한 결합’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러면 신명기 24장에서 왜 모세는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했는지 묻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에 대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8절)이지 “본래부터”(즉 창조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최소한’ 지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정도에서 만족했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은 죄성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수준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고도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살아 갑니다. 또한 제자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 없이 용서하며 품어 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 나라의 제자에게 있어서 이혼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절)라고 말합니다. 한 여자에게 영원히 매이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의해 다시 지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당시 결혼에 대한 남성들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었으며 얼마나 타락했던지를 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독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독신으로 살아야 할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고,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예수께 청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어른들의 필요를 채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주된 관심었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14절).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순수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서의 어린이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먼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열립니다. 따라서 그 나라를 아는 사람들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마음과 손을 열어야 합니다.

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물질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 된 본성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창조의 섭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제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최소한’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대한’이 기준입니다. 

그 원리는 제자의 모든 생활에 적용 됩니다. 제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제자됨을 시험하는 가장 혹독한 훈련장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같은 사람의 같은 잘못을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18:22)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토록 자주 상처를 줄 수 있는 관계는 부부 관계 밖에 없습니다. 부부 관계는 무한대의 용서를 행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부부 관계는 제자됨에 대한 가장 혹독한 시험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수준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이혼이 다반사가 된 이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제자로 살기 원한다면 그것을 먼저 배우자에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결혼이 영원한 것임을 믿습니다. 죄성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를 품고 사랑하여 제자로 자라가는 영적 결합입니다. 그렇기에 제자의 결혼은 깨질 수가 없습니다. 무한대로 용서하는 사람에게 결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혼의 아픔을 겪은 분들에게 이 말씀이 정죄하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결혼은 영원한 것이고 따라서 이혼은 죄라고 원론적으로 말씀하셨지만, 다른 곳에서는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 했습니다. 이혼이 죄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도, 바울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혼 당한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맺는 서약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리고 제자가 결혼 관계에서 제자됨을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부부가 모두 제자로 살기를 결단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4 thoughts on “마태복음 19장 1-15절: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1.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은 한 번 씩 독신으로 사는 삶을 상상해 봅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으면 의무 또한 없어지고 자유는 무한대로 늘어날 것처럼 생각하다가도 배우자가 있고 자식이 있기에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 아닌가 싶어집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지키는 일은 따분하리만큼 진도가 조금씩 나가고, 깨뜨리는 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부부 사이에 신뢰를 쌓고 서로를 지켜주고 응원하는 일도 부부라서 더 빨리 더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경험으로 압니다. 확대가 잘되는 현미경처럼 작은 흠결도 다 보여주는 것이 부부 사이입니다.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에 전기처럼 흐르는 감정이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같이 있을 때도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살 뿐입니다. 어린아이로 표현되는 약자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 더 아픈 사람은 눈에 안 들어오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만 보인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값싼 동정심이라 할지라도 약자를 약자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정심이나 연민마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차단 시키는 일체의 일들이 사회악의 씨앗이 됩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더 서럽고 추운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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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결혼 할 당시는 어느 누구도 혹 이 결혼이 잘 못 되면 이혼을 하겠다고 생각하며 결혼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끜내는 이혼으로 끝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이혼을 해도 돠냐고? 어떤 논리를 묻는 그 자체가 우리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죄성이 나타 난 것이지 어떤 논리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며 내 3 자녀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며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혼이라는 명제 앞에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고 부서지며 그에따른 얼키고 설킨 얼룩진 현실에 있는 가정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격는 어려움에 기도 밖에는 다른 위로는 없는 거 같습니다.
    늘 어린 아이같은 약자의 예를 들으시는 주님의 진리 앞에 하늘 나라를 생각해 보며 더 겸손히 낮아져야 겠다고 느끼는 아침 입니다, 또한 CVID-19에서 빨리 풀려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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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부족하고 천한 사람을 제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가정과 자녀들을 주시고
    과부와 고아와 궁핍한 이들을 살피라고 교회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것이 불편한 진실 이지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당하는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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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 앞에서 제자로서 사는 삶은 단순한 천국티켓을 가지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죄성을 부인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구 하는 삶입니다.

    어제의 말씀인 용서를 하는 일도 자신의 능력으로만 할 수 없음을, 부부 관계안에서의 사랑과 하나님의 성품을 살아가는 것도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없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혼자 은혜안에서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말씀과 은혜를 내 삶 속, 가정에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힘든 싸움인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내 아내에게, 가족에게 보이는 그 것이 정말 말씀을 실천하는 삶인 듯합니다. 남에게는 그 말씀을 실천하기 쉽지만, 그 말씀이 가까운 가족에게는 실천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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