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장 1-20절: 무엇이 거룩한가?

해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결국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 보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합니다(1절). 안식일 금령을 범하고 자신을 성전, 다윗, 요나, 솔로몬 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면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가 “장로들의 전통”(2절)을 지키지 않는 문제에 대해 따집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율법 규정을 위반하지 않도록 후대에 만들어진 ‘시행 세칙’입니다.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도 복잡한 시행 세칙이 있었고, 음식을 먹는 과정에 대해서도 복잡한 시행 세칙이 있었습니다. 그 시행 세칙은 좋은 뜻으로 만들어졌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고 율법 규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해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고르반 법’을 예로 드십니다. 고르반 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헌금 생활을 위해 마련된 법입니다. 물질적으로 너무나 가난하여 하나님께 헌금할 의무와 부모 공양의 의무를 모두 행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부모님께는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5절)라고 말하면 부모 공양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을 악용하여 부모 공양의 의무를 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것을 비판하십니다(8-9절).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분노하여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스스로 눈 멀었으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들”(14절)이며,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들”(13절)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 예수님은 남은 사람들에게 ‘거룩’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음식)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1절).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배설물이 되어 나옵니다(17절). 오줌과 똥을 더럽다 하지만 그것은 실상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더러운 것은 마음에서 나와 입으로, 눈빛으로 혹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악입니다(19절).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거룩함에 대한 레위기의 규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십니다. 사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레위기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사람(죽은 사람, 나병 환자 등) 혹은 사물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부정타는 것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으로 자신의 인생을 더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 조상들은 부정 타는 것을 매우 꺼렸습니다. 까마귀가 집 앞에서 울면 부정 탄다고 했고, 길에서 짐승의 시체를 보아도 부정 탄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비정하게도, 장애인을 만나는 것도 부정 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무지몽매했는지 깨닫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율법에 따라 부정 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고 살았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레 11:44)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거룩한 백성으로 형성되기 위한 지침을 주십니다.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가나안 주민들과 차별성 있는 민족으로 형성되기 위해 주신 지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침이 나중에는 약자들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함에 대해 새로이 규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은 부정 타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얻을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모든 음식은 깨끗합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악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위생과 영양만을 생각하면 됩니다. 정말 조심할 것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먹는 것을 구별함으로써 차별성을 드러내야 했지만, 오늘 이 땅에서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차별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5 thoughts on “마태복음 15장 1-20절: 무엇이 거룩한가?

  1. 전통이라는 허울속에 약자들을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율법의 본 뜻을 오용하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짓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아직도 전통이라는 규범으로 믿음 생활에 부담이 되는 것들을 상기해 봅니다.
    우리안에 자리잡고 있는 분노, 시기 질투 같은 악한 것들이 종종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이제는 착하고 선한 것들로 마음의 곡간을 채워 선한 것들이 밖으로 나올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외형적인 것보다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오늘도 마음을 비우고 선한 것들로 채우는 하루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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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죄를 깨닫게 하심(롬 3:20) 이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고 주신 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해 할 수 있었다면 굳이 장로의 유전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지적은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투명한 유리안에 발가벗긴 상태로 갇힌 사람이 유리 밖에 있는 사람에게 옷매무새를 고치라고 충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는 믿음을 통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믿음의 주인으로 자신들 앞에 서 계셨던 예수님께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 그들에게 주셨던 율법의 부속물인 장로의 유전을 가지고 따졌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앞에 계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온전치 못한 지식은 우리를 소경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읽고 외웠으며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율법의 목적조차 알 수 없었을까요. 자기중심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잘못된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아는 많은 지식이 가슴을 치는 회개로 나를 이끌지 못한다면 나 역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비해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변화되기 전에는 그들과 동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의 제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 자부했던 사울이 바울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의 뜻과 같이 큰 자가 작은 자로 바뀌었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 된 신앙은 큰 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주인이 된 신앙은 작은 자의 삶일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성경을 다시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3년 이상을 칩거하며 가슴을 치는 회개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눈물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성경이 눈물로 젖어 구겨져 있는 곳이 많았고 예전에는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서 한 마디도 기도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는데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기도는 번지르 하지만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잘못된 습관과 더러운 죄가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신 하나님의 판단이 혹시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이아침 조용히 나의 마음속을 살펴봅니다. 편안한 삶이 혹시 나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고통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 가슴을 치는 신앙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평생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겠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가슴을 치는 회개가 나의 신앙생활에서 빈번히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경을 보는 나의 눈이 어두워져 가는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 들입니다. 새벽마다 간구하는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나의 날마다의 삶속에서 나타나기를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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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모양만 거룩해 남들을 속으로 정죄 해왔습니다. 삶의 내용이 정결 하기를 원합니다.
    보혈로 마음이 깨끗히 씻겨 마음과 입술과 삶이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웃과함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길을 걷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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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교 전문가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됩니다. 율법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으려 하지 않고 계명의 준수 만을 앞세우니 영성은 빛을 잃고 종교성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내면의 악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게 아닐 것입니다. 하찮고 작은 일이라고 부주의하게 넘어가다 보면 양심 또한 서서히 굳어집니다. 씨를 뿌리고 얼마 동안 시간이 지난 뒤 순이 올라오고 또 시간이 지난 뒤 그 순에서 꽃이 활짝 피는 생명체의 열림도 처음에는 조금 조금, 점점 크게, 그리고 아주 크게 일어납니다. 알곡을 맺지 않는 잡초도, 남을 해치는 악도 같은 과정을 밟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의 등장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어쩌다 파산하게 되었소?” 물으니 돌아온 답이 “두 가지 방법으로. 조금씩, 그러다 갑자기 (Two ways. Gradually, then suddenly.)” 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 대부분도 이 “두 가지 방법 – gradually, then suddenly”으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팬데믹이 되어버린 코로나바이러스 자체는 강하고 빠르게 전파하는 병이지만 우리의 반응은 우한에서 처음 발병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작년 12월부터 처음 두 달 정도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드문드문 우려했을 뿐입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정말 갑자기 전세계적인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예배당문이 닫히고, 사람들 사이에 적막이 흐르고, 인류의 문명이 일궈낸 정원에는 찬 바람만 지나갈 뿐입니다. 좋은 것을 주셨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상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잘못을 봅니다. 수난절을 지나며 주님께 처음으로 나아가던 때를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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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엄부의 모습에서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참부모의 마음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먼저 본인의 마음을 활짝열어 보여주셔서 진정한 교제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항상 우리의 성품의 한계와 가치관의 기준을 깨뜨리시며 오늘도 겸손한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닮게 하시니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눈에도 보이지않는 작은 세균앞에 벌벌떨고 무서워하며 사재기에 앞장서는 우리 자신을 보며 주님앞에 회계합니다. 오늘도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시며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나보다 못한 약자들앞에서 “부정탄다”는 나의 선입감과 전통주의에서 이전 벗어나 아버지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 나의 삶과 행동으로 차별성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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