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20-30절: 하나님께 돌아가기까지

해설:

믿지 않는 세대에 대해 책망 하시는 동안 예수님께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생각났습니다(20절). 이 도시들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던 동네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기는 할망정 회개 하지는 않았습니다(21절). 그들에게 볼 눈이 없었고 들을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운명을 생각하며 탄식하십니다(22-24절).

회개할 줄 모르는 교만한 세대를 두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한 가지 위로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25절)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늘이 두쪽 나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같은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환영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무시 당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아무 존재감 없던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25-26절). 

감사 기도 중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아십니다.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신을 향해 더듬어 가려 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27절). 

예수님은 이러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 몸부림 쳐 온 사람들에게 초청하십니다. 그렇게 몸부림 쳤지만 하나님은 멀어 보이기만 하고 영혼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서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초청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28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진정한 안식과 위로와 만족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이를 길을 모르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 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분의 은총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짐을 내려 놓고 쉼을 얻습니다. 그분 안에서 새로이 지게 되는 “멍에와 짐”(29절)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입기 위해 지는 멍에와 짐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기에 기쁨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30절).

묵상:

어거스틴이 남긴 말 중에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께 돌아가기 전까지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라는 말이 제일 유명합니다. 이 말이 제일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인간성의 가장 깊은 진실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그분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부모와 분리된 아기는 부모의 품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심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 안기기 전까지는 안식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혹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내면 깊은 곳에 해결되지 않는 불안을 견디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와 이적들은 하나님께 눈 뜨라는 부름입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잘못한 행동에 대해 뉘우친다는 뜻이기에 앞서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실존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을 청산한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고향집을 찾은 나그네와 같이 참다운 안식과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자들, 배운 자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마음 아파 하는 이들이 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3 thoughts on “마태복음 11장 20-30절: 하나님께 돌아가기까지

  1. 우리 즉 내가 창조된 근본을 되색여보며 내가 갈 길을 정리해 봅니다, 세상의 미련에서 벗어나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며 삶의 목적과 과정을 주님께 맡기는 믿음을 구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무심히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영광안에서 온전한 쉼을 얻으며 평화를 누리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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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하실 상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랑의 상대가 즉 세상
    이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울타리에 들어가면 평안과 쉼을 누리는데도 들락
    날락 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메는 멍에는 힘든 멍에 같지만 실제로 평안과 안식
    임을 항상 기억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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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늘나라와 메시야를 계속 묵상합니다.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나. 예수님은 누구인가. 평생을 믿어도 하늘나라에 대해 말해 보라면 우물쭈물하게 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처음 배울 때 들어온 이미지를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들은대로 똑같이 하는 말 말고, 깨달음의 순간에 건져올린 진리가 가르쳐준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모두 그분께 빚진 자요, 그분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회개해 본 사람은 압니다. 회개는 회복의 길로 들어가는 문이지 회복은 아니라는 것을. 회개를 하면 자신의 꼬라지가 보입니다. 그 꼴을 보고서도 “이만하면 괜찮지”하는 사람은 오늘 예수님한테 야단을 맞는 도시와도 같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I am okay”가 유치하게 적용된겁니다. 하늘나라를 죽은 뒤에 가는 유토피아처럼 이상적인 어떤 나라라고 고착된 사고를 애써 흔들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갈등과 불화가 많은 이 세상살이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단어가 지금 내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물으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면 (또 칼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믿지 않는 이 -이방인-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삶이 되어버릴 뿐입니다. 감리교가 가르치는 사회정의 이슈를 하늘나라의 묵상으로 연결하면 답이 조금 보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그리도 많이 경험하고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되레 심판을 받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심판은 죽어서 하나님 앞에서 받는 심판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또다시 강팍해진 마음, 회개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살 때 치루는 댓가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마음을 비워내는 회개를 계속 한다면 가벼워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주님 앞에 짐을 내려놓는 수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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