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1-19절: 예수 이전과 이후

해설:

열두 제자에 대한 훈련을 마친 다음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가십니다(1절). 그동안에는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 때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3절)라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그분” 즉 메시아는 심판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가 듣는 소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5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온전해짐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사 35:1-10). 요한의 질문에 대해 우회적으로 답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답하시면서 예수님은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6절)고 하십니다. 자신의 기준 혹은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대하면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면 의문과 회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모든 예언자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9-10절).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14절)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통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11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활짝 열렸습니다(12절). 그렇기에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크다”(11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들은 세례 요한보다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12절). 이 구절은 새번역보다 개역개정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도 그런 까닭이고, 그런 까닭에 예수님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느리고 부드럽고 조용히 역사하기에 인간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깁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 “느리고 은밀한 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은 초점을 바꾸시어 세례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금욕적으로 살면서 세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18절). 반면, 예수님이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자 사람들은 그를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합니다(19절). 도무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회개할 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묵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뉩니다. 서기 525년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인류 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우리 주님의 해)로 나눈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빛에서 인류 역사를 구분 하려던 시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선민의 역사를 시작하신 후에 이스라엘을 통해 진행해 오신 구원 역사가 세례 요한까지 이어졌습니다. 말라기 예언자가 죽은 후 4백 여 년 동안 끊어졌던 예언자의 계보가 세례 요한으로 이어졌고 완결되었습니다. 이제 율법과 예언의 시대가 완결되고 복음과 은혜의 새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린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로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영예를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이후’의 시대, 복음과 은혜의 시대, 하나님 나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우리 중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은밀하고 부드럽고 느립니다. 제자가 되고 제자로 자라고 제자로 산다는 말은 그 은밀하고 부드럽고 느린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은밀해 보였던 그분의 임재가 환히 드러나고 부드럽게 느껴졌던 그분의 힘은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분의 느린 시간표를 따라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것임을 경험합니다. 

이 진실에 눈 뜨지 못하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것은 우리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폭행을 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 폭행이 실은 자기 자신의 인생에 가한 폭행이라는 사실을!

4 thoughts on “마태복음 11장 1-19절: 예수 이전과 이후

  1. 오실 그 분이 당신 입니까? 식으로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까/ 의문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들을 통해 하는 나라를 보면서도 늘 마음으 한 구석에는 오락가락하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피리에 마추어 춤을 추며 곡에 따라 마음 속에 있는 것둘을 드러내는 순수한 믿음에 이르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은밀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글을 따르는데 망설임이 없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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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말씀을 듣고 읽고 체험 하면서도 메시아 주님을 종종 의심합니다.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되신 예수님을 영혼에 깊이깊이 각인해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웃과 더불어 세상에 하늘나라를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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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다 보면, 그 시간의 흐름과 문화에 발 맞추지 못할 때 뒤쳐짐에 대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사는 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경쟁과 비교가 어떤 면에서는 게으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보는 눈을 가리게 만들고 상대적인 눈으로 판단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느리고, 어리석게 보이고, 답답해 보일지라도 묵묵히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마 어마한 속도로 변화하고 Social Media들을 통해 서로를 너무나 쉽게 비교하는 21세기에서는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오늘.. 지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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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요한의 질문이 아주 동떨어지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회의와 번민이 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하시는 일을 전해 들으면서 긴가민가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마음을 헤아리다보니 엉뚱하게도 우리 사회의 early adopters 단어가 떠오릅니다. 새로운 기술상품이 나오면 가장 먼저 구매하는 그룹입니다. 이들의 반응이 상품의 마켓 운명을 결정 짓는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early adopters 를 다른 말로 “lighthouse customers” 라고 부르는데 일반 소비자들이 마치 등대를 보고 항해의 방향을 찾는 것에 비유해서랍니다. 유튜브를 보며 배우고, 필요한 정보를 얻는 요즘 세상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BC와 AD 구분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출현을 또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는 지도 모릅니다. 하늘나라와 메시야에 대한 나의 태도는 스마트폰을 보는 시각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학입시 SAT 단어 같은 ubiquitous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디에나 퍼져있는) 유비쿼터스를 설명할 예로 드는 스마트폰은 이제 세계 구석구석, 남녀노소, 빈부반상의 경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통화와 소통방식이 달라졌고, 소비문화와 구매습관도 변했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기록을 하거나 증명을 남기는 방법, 집이나 가게의 보안장치도 새로와졌습니다. 시간 개념도 예전 같지 않고 공간 인식은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정도로 확실하게 달라지는 인생이 된다는 뜻에서 혁명적입니다. 믿기 전과 후가 구분이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번민하는 요한이나 에수님의 재림이 자기 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바울이나 제자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이지만 경험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19절에서 “지혜는 그 행한 일 때문에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고, 메시지 번역은 “the proof of the pudding is in the eating”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감옥을 찾아가 직접 모든 질문에 분명하게 답을 했더라면 요한의 마음이 편했을까요.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는 확실한 상태가 되었을까요. 손에 든 폰은 확실하게 믿어지는데 하늘나라는 여전히 저 하늘 구름 속 어디엔가 있는 나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시나 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폰이 아니고 예수님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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