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17-48절: 제자의 기준

해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죄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으나 죄의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죄성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뿐입니다. 모두가 아무 제한 없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세상에서 그 정도만 지켜도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정도의 수준에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의 기준은 율법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제시하는 ‘최대한의 의’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입니다(17-18절). 복음의 능력 안에 머물러 사는 제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를”(20절) 넘어 서야 마땅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의’와 복음이 제시하는 ‘최대한의 의’를 여섯 가지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               (율법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의)                                 (복음이 제시하는 최대한의 의)
  • 21-26절: 미워하는 것은 허락한다. 다만 목숨만 해치지 말라.     미워하지도 말라.
  • 27-30절: 간음하지 말라.                                                       간음의 의도도 가지지 말라
  • 31-32절: 법적 요건만 갖추면 이혼해도 된다.                           이혼하지 말라.
  • 33-37절: 맹세를 했으면 꼭 지켜라.                                         맹세를 하지 말라. 
  • 38-42절: 해를 입었으면 받은 만큼만 돌려 주라.                        보복하지 말라.
  • 43-48절: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하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위의 예로써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분명해집니다. 율법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나무가 병들었는데 그 병은 그대로 둔 채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복음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 시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살며 그 다스림의 영향을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을 변화 시킵니다. 나무의 병이 치료 되면 열매는 저절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처럼 복음으로써 죄성이 치유되면 행동은 변화되고 율법의 수준을 넘어서는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묵상: 

“예수님은 인간을 과대평가했다.” 이것은 어느 유대인 학자가 이 말씀을 주석한 후에 낸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시하는 방향에 대해 정확히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의 말씀은 자연인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성에 물든 자연인으로서는 이처럼 높은 차원의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강철같은 의지와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 차원에 도달해 보기 위해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해 볼테면 한 번 해 보라”고 우리를 도전하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새로 빚어진 제자가 바라보고 추구해야 할 높은 이상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가 되고 제자로 자라고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된 본성을 치료받고 거룩함을 향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즉시로 ‘지상에 사는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육신 안에 살고 여전히 죄성과 씨름해야 합니다. 다만, 과거에는 죄성에 노예가 되어 살았는데, 이제는 죄성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때로 죄성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에게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혼자 죄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싸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제시하신 높은 이상을 마음에 품고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문득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임해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때때로 내 안에 거룩함이 들어차 있는 것을 봅니다. 

5 thoughts on “마태복음 5장 17-48절: 제자의 기준

  1. 율법에 적시 되어 있는 것들도 못 지켜 위선자가 되는 현실에서 예수님이 제시하는 제자의 도를 묵상하며 내가 어디까지 이루어 낼 수 있나 ?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새롭게 되고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따르려는 노력의 끈을 놓지 안고 그 안에서 참된 진리를 추구해야 되겠다고 스스로를 다집해 봅니다.
    주님의 기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에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그 진리 안에서 평화와 안정에 도달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죄인임을 깨달게 해 주시어 감사를 드리고 또 지속적인 묵상과 기도로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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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나의 의로 삼기 위해서 열심히 지키려고 한다면, 아마도 금방 나가 떨어질 듯합니다.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절망감만 맛 보겠지요. 복음과 율법의 현명한 차이는 외적인 변화와 내적으로 나오는 변화인 듯합니다. 율법을 외적으로 잘 지키면 지켰다고 할 수 있지만, 복음은 내적으로 나오는 변화로 시작되어서 자연스럽게 외적인 변화가 되는 거지요.

    변화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첫번째는 물질적변화, 두번째는 화화적 변화. 이 두가지는 변화는 하나, 겉모습만 변화하는 것이고, 세번째인 유기적 변화는 속에서 부터 변화해서 외적인 것이 새롭게되는 것입니다.
    겨자 씨가 나무가 되어지고, 애벌래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제 삶에도 유기적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복음의 기준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내적인 회개와 변화가 되어지고, 내 삶과 언행이 자연스럽게 변화되어지는 복음의 삶, 제자의 삶을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한마디로 내 말은,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 In a word, what I am saying is, Grow up.” (Matthew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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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국에서 교회 다닐 때 가까운 권사님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은 “우리는 커트라인이 높은 학교에 다니는거다”라는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교회를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성경공부나 기본신학이 당시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파격적이고 낯선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이루어지는 하늘나라, 삶의 불연속성 (매일 새로와지는 존재), “애간장이 끊어질 듯” 뜨거운 동정심을 가진 예수님…그 권사님 계시던 교회에서 자주 듣던 표현입니다. 결혼하기 직전부터 출석하던 교회라서 결혼하려면 교회에 같이 다녀야한다는 나의 “조건”을 받아들인 남편에게는 생전 처음 발을 들인 교회이기도 합니다. 커트라인이 높은 학교라는 표현은 그 당시의 입시환경에 빗대어 점수가 높은 (똑똑한) 사람이어야 다니는 교회라는 표현이 아니라 어려운 거를 가르치는 교회, 기준이 높고 기대가 높은 교회라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으니 그 교회가 생각이 납니다. 율법도 어려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보다 열 배는 더 어려워 보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보다 훨씬 나은 (19절)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나 싶습니다. 어딘지 언밸런스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늘나라, 예수님이 보여주는 새 세상은 성적순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2012년 TED 에서 “Fake It Till You Make It – Power Pose” 라는 제목으로 말한 교수가 있습니다. Amy Cuddy 라는 사회과학자인데 제목 만으로는 살짝 사이비 같은데 그의 18분 강연은 감동적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진실이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현재 내가 가진 능력으론 못할 것 같아도, 이미 그렇게 된것처럼 믿으며 흉내내다보면 그 모습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이 교수의 이론에 제동을 걸만한 다른 한 축의 이론은 가면증후군 (imposter syndrome) 을 들 수 있겠지요. 봉준호 감독 옆에서 깔끔한 번역으로 화제가 된 샤론 최씨가 최근에 자기의 성공이 단순히 운으로만 얻은 것이 아닐까하는 회의에 시달렸다고 밝혔답니다. 성공한 사람마저도 자기회의를 갖게 만드는 심리가 imposter 증후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참 많은 기억과 생각이 떠오릅니다. 읽어지는대로 자동 해석을 해서 눈을 빼고, 손을 자르겠다고 결심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외눈이 되고 한 손 뿐이라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나라는….커트라인이 높은 학교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쉬지않고, 그 학교 교복을 입은 나를 상상하며,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이 공부 뿐이라는 마음으로 사는 학생이 들어가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학교나 공부라는 단어를 빼고 “사랑”으로 바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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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두 손,두 눈,두 발, 없는 가련한 불구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살리신 주님께 온몸과 마음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변화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매 시간 보혈로 씻음
    받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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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목사님의 오늘 묵상의 말씀은 Salvation is not an event but a process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매일 같이 죄성을 자각하고 맞서 싸울 수 있게 하시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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