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161-176절: 권력에의 욕구

해설: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라 총 22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은 여덟 행으로 되어 있는 시편 119편의 마지막 두 연을 읽습니다. 여기에도 네 가지 주제(율법에 대한 찬양, 율법을 묵상하고 지키겠다는 다짐과 고백, 불신자들의 억압과 박해 그리고 고난으로부터 구해 달라는 호소)가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동안 “교만한 자” 혹은 “악인”으로 부르던 대상을 여기서는 “권력자”(161절)라고 부릅니다. 권력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말은 신앙적으로도 통하는 말입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점점 작아지고 악행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시인은 권력자의 폭행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떠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떠났을 때 받게 될 불행이 그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님의 말씀에서만 기쁨을 찾고 “하루에도 일곱 번씩”(164절)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 고난을 당하더라도 오직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그분의 손길을 기다립니다(166절). 마지막으로, 시인은 다시금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169-176절). 자신이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묵상:

영성가들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돈, 권력 그리고 섹스를 꼽습니다. 이 세 가지는 복된 삶을 누리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좋은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절제력을 잃고 이 욕망들에 휘둘리는 데 있습니다. 칼이 병을 치료하는 유익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고 죽이는 흉기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욕망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파괴시키며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권력에 대한 의지와 욕망이 있습니다.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었다면, 그 추진력은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자제력을 잃으면 권력은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크든 작든 권력에 취하면 하나님을 업신 여기게 되고 악행에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흉하게 표출될 경우 ‘갑질’이라고 부릅니다. 약자에게도 권력에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흉하게 표출되는 것을 ‘을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매일의 기도는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저는 왕이 아닙니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오셔서 저의 왕이 되어 주시고 저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고개 숙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에의 욕구에 사로잡히는 불상사를 막는 일입니다. 

6 thoughts on “시편 119편 161-176절: 권력에의 욕구

  1. 여기에 나온은 시인같이 나도 하루에 7번씩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주님의 계명을 따르며 내가 주님의 증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율례들이 내 입술에서 찬양으로 쏟아져 나오기를 간구하며 그 영성을 통해 돈과 권력과 섹스를 다스릴줄 알게하시고 그 것들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가고 하나님을 찬양한 도구로만 사용되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요.
    편리한 돈보다 평화로운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 하루를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간구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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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 내려오는 영적 축복과 물질적 축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을 너무나 원해서 예수를 믿는 목적이 축복이 된 분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라면 세상적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모두 신앙인이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분들 중에도 세상에서 잘나가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물질적 축복과 신앙과의 사이에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렵게 살 때는 전도하는 분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예수 믿으면 축복받아 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 말을 듣고 교회에 오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처음에 복주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나에게 축복을 주신다면 주님을 더 잘 섬기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말입니다. 그때 나는 세상적 부와 명예가 주는 위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분수에 넘치는 부가 주어지고 세상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어 내가 하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명예가 주어질 때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겸손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유명한 목회자들도 돈과 여자에 넘어가는 것을 보면 비록 하나님께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라 할지라도 겸손을 이탈한 생각과 마음은 하나님조차 거부하는 멸망의 자리로 몰아 넣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162)

    다윗은 많은 탈취물을 얻은 느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 느낌을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에 비유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세상적 탈취물을 얻은 것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선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163절)

    그는 세상적인 것들이 거짓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속지 않았습니다. 많은 탈취물이 보기에 좋고 먹음직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더 사랑하기에 그 유혹에 속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받아 드리게 됩니다. 우리 조상 아담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던 선악과에 속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기도 전에 존재했던 다윗은 보기에도 좋고 먹음직 했던 그 탈취물에 어떻게 속지 않았을까요.

    주님의 법을 사랑할 때 거짓이 미워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축복주시는 예수이기에 믿고 싶었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안다 하며 세상적인 것에 자주 속는 삶을 산다면 스스로 신앙생활에 문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173절)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많은 것들을 보며 사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많은 부를 얻기고 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가난하며 핍박 받을 때는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속이는 거짓된 것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정말로 결단하지 않고 어떻게 이 유혹들로 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주의 법도를 택하였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많은 탈취물이 주는 위로와 기쁨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법을 택했고 묵상과 기도를 통해 그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범적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이 다윗의 위대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천하를 통일했던 왕 다윗이 자신의 베겟닢을 적시며 울 수 있었고 하나님의 궤 앞에서 바지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출 수 있었으며 평생에 공과 의를 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거짓을 볼 수 있도록 그를 도와 주셨던 주의 손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우선순위가 바로된 신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아침 주님의 도움을 바라며 주님께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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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오늘 시편말씀의 저자는 저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vv.175-176)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는 하나, 매번 길을 잃은 좌표처럼 똑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고, 빛이 되어서 이끌어주기를 소망하나, 여러 걱정과 근심의 안개로 인해서 희미하게 보이는 제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계속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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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의 말씀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사랑의 주님만 바라보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걷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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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권력자들이 까닭 없이 나를 박해합니다 (161절)”라는 시인의 탄원이 우리 시대에는 “권력자들의 횡포가 서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로 바뀌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시인이 사랑하고 지키는 주의 교훈은 이제 그가 가진 단 하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보물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기에 마음이 평안하여 아무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165절). 내 존재의 한 가운데, 중심의 심연에 하나님이 계신지 묻습니다. 오직 주님 만으로 기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면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든 권력자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궁극적인 악한, 사탄의 온갖 술수에 혼을 뺏기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살려주소서. 주의 종을 찾아주소서. 시인의 간절한 기도가 나의 입술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Help, Thanks, Wow” 이 세 가지 뿐이라고 말하는 한 작가의 지혜가 빛나는 아침입니다. 아픔과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세상을 살며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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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영화 기생충에서 나온 대사가 생각납니다. 부자가 착한게 아니라 부자라서 착하다. 부자라서 여유가 있고 걱정이 덜하며 배풀 수 있다라는 논리죠. 돈만 있으면 가난에 쩔어 암담하지 않고. 치열하게 거짓말 할 필요도 없으며. 어둠에서 숨어 사는게 아니라 떳떳하게 사교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돈 많은 사람은 법과 관례가 허용하는 선 안에서 돈 없는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 선을 넘어서지 않는가 보이지만 속으로는 돈 없는 사람들을 천시하며. 암암리에 차별하며 모멸감을 줍니다. 이건 우리가 반듯이 기억해야 할 죄성입니다.

    본문에 시편저자는 거룩한 선을 넘어선 권력자들에 대해 얘기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거룩한 선은 어느 말과 행동에 국한된게 아니라.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믿음이 즉 율법을 묵상하며 가르침을 받는 마음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돕습니다.

    누구나 태생과 가정적 배경이나 직업에 따라 어느정도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남자이고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안정하고 건강합니다. 그런 권력을 거룩한 선과 법과 관례의 선 사이에서 제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 믿음이 얕음을 십자가의 사랑을 잊고 살아가는 제 모습을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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