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5장 1-33절: 온전함이 깨어질 때

해설:

남자의 성기에서 고름이 흐르거나 고름이 고여 있는 경우에도 그 사람은 부정합니다. 또한 그 사람이 접촉하는 모든 물건에 부정이 옮습니다. 부정해진 물건에 접촉하는 사람에게도 부정이 옮는데, 저녁때까지만 부정합니다. 부정해진 것을 알게 되면, 옷을 빨고 몸을 물로 씻어야 합니다. 부정해진 오지그릇은 깨뜨려야 하고, 나무그릇은 물로 씻어야 합니다(1-12절). 

고름이 그쳤거나 말랐을 경우, 그 사람은 일 주일 동안 더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일주일 후에 완치된 것이 확인되면,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목욕을 해야 합니다(13절). 그런 다음, 여덟째 되는 날,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속죄제물과 번제물로 드려야 합니다(14-15절). 그 때에야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정액을 흘리는 경우에도 부정합니다. 흘리는 정액이 옷이나 가죽에 묻으면 그것들도 저녁때까지 부정합니다. 그럴 경우, 물로 빨아야 합니다(16-17절). 성관계 중에 정액을 쏟는 경우에도 남녀 모두가 부정합니다(18절). 

여성의 성기에서 하혈을 하는 경우에도 부정합니다. 생리로 인한 하혈인 경우에는 일주일 동안 부정합니다. 그 여성과 접촉하는 사람도 저녁까지 부정해지고, 그 여성과 접촉된 모든 물건도 부정해집니다. 생리 기간 동안에 성관계를 맺으면 그 여성의 부정이 남성에게 옮겨져 일 주일 동안 부정합니다(19-24절). 생리와 상관 없이 하혈이 계속되는 경우에도 그 여성은 하혈이 계속되는 동안 부정하며, 그 여성과 접촉된 물건은 무엇이든 저녁까지 부정합니다(25-27절). 하혈이 멈추게 되면 그 여성은 일 주일 동안 두고 보아야 합니다. 기간을 채우고 나서 완치가 분명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 속죄제물과 번제물로 드려야 합니다(28-30절).

이렇게 부정하게 되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31절)이 부정하게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묵상:

남자의 성기에서 고름이 흐르는 경우에는 성병 때문입니다. 성적인 부정을 통해 병을 얻었다면 부정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액을 흘리는 경우 혹은 생리혈을 흘리는 경우에도 부정하다고 판정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생리가 아닌 하혈의 경우에도 성적인 부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므로 굳이 부정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의아스럽습니다. 

이 의문은 “부정하다”고 번역된 말의 느낌 때문에 생깁니다. 거룩함의 반대 개념이 부정함이라고 본다면, “부정하다”는 말은 죄로 인해 오염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성관계에서 정액을 흘리는 것 혹은 생리로 인해 하혈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판정하는 것이 부당해 보입니다. 질병을 얻어서 하혈이 멈추지 않는 경우에도 부정하다고 판정하는 것은 가혹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혈로 인해 그 여성이 견뎌야 할 육신적 불편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부정함”은 죄로 인해 거룩이 깨어진 경우만이 아니라 “온전함을 잃은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악성피부병의 경우도 여기에 속합니다. 산혈로 인해 부정해지는 경우도 온전함이 깨어진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교 중에 정액을 쏟거나 생리 중에 하혈을 하는 것 혹은 어떤 질병으로 하혈을 하는 것은 모두 온전함을 벗어난 상태에 속합니다.

온전함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그 상태를 말합니다. 그 온전함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온전함이 깨어졌기에 인간의 삶에는 다양한 종류의 “깨어짐의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 증상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깨뜨린 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어짐의 증상이 나타날 때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그 깨어짐의 증상이 사라졌을 때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드리게 규정한 것입니다.  

제사는 속절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깨어짐의 증상들에 대한 ‘대증요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사로 문제의 근원인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제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분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온전하고 거룩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 thoughts on “레위기 15장 1-33절: 온전함이 깨어질 때

  1. 그 당시 벌써 남자의 경우 성병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대동아 전쟁 당시 일본정부에서 오로지 처녀들만 위안부 여자로 되려갔는지가 이해됩니다, 여성의 생리에 대한 정결 예식도 그 여자들이 생리하는 동안 또 하혈는 동안 하고 성적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으로 이해하면 어떨가 생각해 봅니다,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거룩한 성품에 비견되는 우리의 부정 함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깨끝함을 되찾을 수 있에 긍국적으로 주님앞에 귀결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항상 신체적인 정결 함을 잃지 않도록 건강 관리도 잘 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남은 여생 영육의 경건함에 손상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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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어릴 때 어른들이 “부정탄다” 소리를 하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제대로 답을 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엄마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엄마한테 부정탄다는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다 미신이지 부정은 무슨 부정” 이라는 답에 이어, “예수 믿는데 부정 타는게 어딨어” 라고 못까지 박았습니다. 믿음은 믿음인데 교회를 안 다니고 따로 공부하지 않으니 “근거를 댈 수 없는” 우리 엄마 스타일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지금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 본문 같은 구약의 율법과 관계가 있지 않겠나 추측해봅니다. 여자들은 월경 때문에라도 자주 격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생리주기가 맞는 여자들끼리 같이 모여 잠을 잤을 지도 모릅니다. 90년대 말에 “The Red Tent” 라는 소설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구약시대 여자들이 부정한 기간 동안 모여 살던 장막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책입니다. 성경과 유대 전통을 바탕으로 당시 여자들의 눈으로 본 세계를 그렸는데 재미도 있고 상당부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부정하다고 격리되어 있는 여자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어 레드 텐트는 곧 여성의 공동체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데 창세기에서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 라헬이 집의 신상 (드라빔)을 몰래 들고 나와 깔고 앉았는데 라헬이 월경 중이라 라반이 손을 대어 뒤져보지 못했던 부분도 떠오릅니다. 2차 대전 중에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일본인들을 집단수용한 역사도 떠오릅니다. 연말에 여선교회 관련 모임에서 일본인 4세 의사부부 옆에 앉게 되었는데 부인이 자기는 수용캠프 (Japanese Internment Camp 1942-1945)에서 태어났답니다. 부모가 한 번도 캠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거기서 태어난 것만 알지 어떤 배경, 어떤 의미인지 깊이 몰랐는데 자기 사촌들 중에 연방법원과 주법원 판사를 비롯해 변호사도 많이 나왔다면서 “부당함에 대한 선의의 복수,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가 은연중에 나타난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당장 난민과 불법 이민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떼어 놓는 것도 봅니다. 유대인들이 똑똑한 것은 그들을 집단적으로 격리시키고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말씀을 따라 선민으로서 남들과 다르다고 스스로를 인식하지만 주변 민족들의 눈에는 같이 살기에 유별난 사람들, 동화되지 않고 섞일 수 없는 집단….그래서 소수지만 살아남기 위해 지능도 기술도 빠르게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어찌 되었든 “부정타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법칙이 되었고, “부정하다”고 따로 제껴놓은 사람들중에는 새로운 공동체와 삶의 의지를 발견한 사람도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만인의 주님이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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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무리 깨끗할려고 노력을해도 불가능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한 영혼과 가정과 교회가 되는것을 알려주신 오늘의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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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성행위는 폭력과 더불어 인간사회에서 만연해왔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사회적 규범이 변하면서 성행위와 폭력은 그 정도와 형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근래에 르완다나 보스니아 내전에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에 율법은 구약시대 배경에 온전하지 않은 성행위를 규정해줬습니다. 여성은 남자들의 소유재산과 같았고. 힘있는 남자들은 살인과 강간을 통해 여성들을 취했고. 지위가 낮은 여성들은 곧잘 자신의 몸을 팔아 연명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 율법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틀을 마련해 줬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고있던 이스라엘 민족도 지금 우리도 온전하지 못하는 죄의 습성은 계속됐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거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게셔야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때문에 곧잘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새겨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삼지 않도록. 율법을 묵상해서 우리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향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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